번역과 소통의 이중주
번역의 불완전성은 언어가 다른 국제 연애 최대의 난관이자 묘미이다.
M과 연애하던 시절, 한국어를 아예 모르던 M은 종종 구글 번역기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주로 ‘your fart smells like flowers’ 같은 쓸데없고 원초적인 말들이었다. ’bang-gwineun kkoch naemsaeganayo’ 라고, 한국어를 읽을 줄 모르는 M이 영어 음차만으로 ‘구불구불한 한국어’를 열심히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가끔은 너무 기특해서 전혀 이해를 못했는데도 오구오구 하고 칭찬을 해줬다.)
가끔은 나도 짧은 단어들을 한국어 문자로 M에게 보냈고, M은 알아서 구글 번역기를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내 귀염둥이’라고 한글로 문자를 보냈더니 M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왔다.
‘너 뭔가 실수한 거 아니야 민?’
웃음기와 황당함이 함께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번역해봤자 ‘cutie pie’ 정도일 것이 뻔한 단어 ‘내 귀염둥이.
그런데 구글 번역기가 그걸 세상에, ’my cool little bitch’라고 번역한것이다.
맙소사.
그런데 당황스러움 보다도 먼저 폭소가 터져나왔다. 나는 졸지에 남자친구에게 B-word를 쓰는 망나니가 되었다. M은 이걸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삼고 있다.
이런 ‘다소 어긋난 번역’들은 가구의 자잘한 스크래치처럼 나와 M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내 모국어는 한국어, M의 모국어는 더치, 그리고 우리는 영어를 공통 언어로 사용한다. 번역만으로는 모국어의 뉘앙스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기술 용어와는 달리, 예를 들어 네덜란드어의 gezellig 같은 단어는 예전에 썼다시피 한 문화권에 대한 공감각적인 이해가 필요한 표현이다.
이럴때 필요한 것은 바로 경험에서 출발한 상상력이다. 네덜란드 인테리어 특유의 낮은 조도, 나무 가구들, 포슬린 인형, 식물, 부드러운 천, 따뜻한 온도, 한가로운 웃음, 대화, 즐거움, 화목함.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이 내가 Gezellig 함을 설명할때 상상하는 것들이다. Gezelligheid 같은 단어들은, 이런 가지 각색의 재료를 합해 만든 요리와 같다.
한국어의 ‘꼰대’, 영어의 ‘hood’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단어에 레이어링된 의미들을 일일이 설명하며 번역할 수야 있겠지만 최종적인 이해의 깊이는 그 문화권에 대해 어느정도의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단어도 이런데, 이런 단어들이 합쳐진 숙어나 문장들은 번역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가.
하지만 이 어려움이 역설적으로 나와 M의 의사소통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우리는 모국어를 공유하는 커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감각적 지식과 경험을 나누려고 노력한다. 나는 M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 소설을 읽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렸을 때 나는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으면서 유모 패거티와 코퍼필드의 엄마가 함께 앉아있는 영국 가정의 응접실이나, 그의 하숙집에서 구운 고기파이의 맛을 상상해보곤 했다. 물론 나는 서포크 출신이 아닌 아홉 살 한국 여자애였고, 내가 상상한 고기파이는 동네 빵집 고로케 같은 맛이었다. 아마 내가 평생을 노력해도 영국인들만큼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잘 이해하긴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매개로 한 ‘완전한 이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붉은색의 정의가 인간마다 다르고, 디킨스가 묘사한 고기 파이는 영국인마다 각각 다르게 상상할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경험에 근거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서로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나와 M은 조금 더 수고를 들여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한 단어를 번역해 설명할 때 우리는 수 분을 들여 대화를 나눈다. 대신 정보의 교환 과정 중 필연적으로 여러 감정을 교류한다.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추상적인 경험의 폭이 확장된다. 나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다. M이라는 인물의 역사를 함께 읽어나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때 나는 번역이 아닌 '소통'의 힘을 느낀다.
한국의 존대어를 전혀 모르던 M이 내 형부인 D에게 잘못된 예의를 차린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한국어로 ‘형’이 형제뿐만 아니라 나이차가 다소 나는 또래의 남자들끼리도 쓰인다는 것을 M은 어렵게 이해한 참이었다. 자기 혼자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고민하더니, M은 D를 대뜸 ‘형씨’ 라고 불렀다.
예의바른 표현 ‘형’+ 예의바른 표현 ‘씨’ = 매우 예의바른 표현 ‘형씨’ 라는 공식이었다.
우리 가족은 배를 잡고 웃었다. 너무나 애써서 나름 논리적인 결론을 내려고 노력한 것이 기특했고, 그 결과가 영어나 더치로 번역하기 너무나 곤란한 ‘예의 없는 표현’이라는 게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M의 착한 의도를 인간이라면 응당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M은 우리 부모님에게 그야말로 ‘귀염둥이’가 되었다. 번역과 소통은, 이렇게 온도차가 다르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네가 아는 것 또한 완전하지 않지만, 감정의 신기한 화학 작용으로 상상도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영화 Lost in Translation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라는 유치한 제목으로 번역한 사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오글거리지만 말해본다. 네, 사랑은 통역이 됩니다.
p.s. 시간이 지날수록 구글 번역기의 피드백 수준이 높아지는지 예전처럼 황당하고 웃긴 번역은 많이 나오진 않는다. ‘내 귀염둥이’가 ’이제는 ‘my cutie’라고 점잖게 번역된다. 혹시나 싶어서 몇년전 인터넷 밈이었던 ‘육회’ 번역이 궁금해서 번역해보니 이제는 ‘six times’ 가 아니라 제대로 ‘raw meat’라고 번역된다. 어린 아이였던 구글 번역기가 이젠 어른이 된 느낌이라 조금 아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