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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Apr 09. 2021

De 와 Het 사이에서 휘청거리네

네덜란드어 까막눈의 하소연 1


관사가 대체 뭔가요? 동사는 먹는건가요?


재수없는 소리지만 나는 영어를 별다른 노력 없이 그럭저럭 해왔다. 잘 한다는 건 아니다. 그냥 어려움 없이 일상생활 살 정도로 쓴다는 말이다. 


부모님 덕분에 일곱살 무렵 미국에 자암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익힌 영어로 무려 30여년을 꿀을 빨며 살았다. 어린 뇌는 스폰지와 같이 지식을 쑥쑥 빨아들인다 했던가. 나는 영어 문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관사? to부정사? 목적어? 물론 그런것들을 고등학교때 수능 공부를 하거나 유학 전 토플 시험을 칠때 '읽어본' 적은 있지만 그건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행인같이 존재감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구글링을 하며 동명사라는 것을 처음 들어보았다. have 가 having이 되면 동명사라는게 된거란다. 나는 몰랐다. 그냥 자연스럽게, '당연히' 그렇게 변하는거니까 라고. 물론 내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울퉁불퉁한 숲 속 호수에서 피겨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면 나는 비단결같은 빙질의 최고급 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내가 잘하나봐' 라고 착각한 셈이다.


게다가 중학교때 불꽃같은 오타쿠 시기를 거치며 정열적으로 익힌 오타쿠 전용 일본어는 나를 거만한 착각쟁이로 만들었다. 나는 언어에 재능이 있구나, 하하하!

(오타쿠 전용 일본어란, '거스름돈이 약간 모자란데 다시 계산해 주시겠어요?' 같은 실제 일본어는 못 말하는 주제에 '나는 우리들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태어났어, 함께 싸우자!' 따위는 주절주절 잘도 지껄이는 사람들이 쓰는 일본어이다.)


그러나 게을렀던 10대-20대의 카르마가 요즘 내 눈물샘을 후려치고 있다.

내 늙어버린 뇌에 네덜란드어를 채워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어.

애증의 네덜란드어.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앞엔 여섯권의 교재가 놓여 있다. 2013년부터 이 나라에 살면서 서당개가 글 읊듯이 단어들은 대충 익혔다. 슈퍼마켓이나 레스토랑 메뉴판같은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단어들로 문장을 조합할 수 있느냐? 전혀.


물론 나도 인겁을 두르고 태어나 약간의 염치는 가지고 있기에, 네덜란드어가 공식 언어인 나라에 살면서 영어만 쓰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 좀 어려워야 말이지. 2013년에 한번, 2016년에 한번, 2020년에 한번, 나도 나름대로 어학공부를 각 잡고 시작해보긴 했었다. 하지만 도무지 머리에 입력이 안됐다. 영어와도 한국어와도 전혀 다른 체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어 왕초보 수업 시간에 하는 것들이 있다. 알파벳을 읽는다거나, 숫자를 센다거나. 

일단 그땐 방심하기 쉽다. 영어 알파벳이랑 모양도 똑같고, 발음도 비슷한데다 (i와 e의 발음이 영어와 정반대인걸 제외하면), 숫자도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 에인 트붸이 드리 피어 페이브' 처럼 영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영어 친척이라더니 3개월 안에 4개 국어 구사자가 되겠구만, 이것 참, 잡지 인터뷰 준비해야겠네' 라는 되먹지 않은 희망과 뽕이 마음 속 한가득히 들어찼지만, 나는 곧 관사라는 적과 부딪혔다.





 

네덜란드어-영어 사전의 한 페이지. 관사 Het 과 De가 단어들에 표시되어 있다.  photo by Min van der Plus, 2021.


한국어에는 관사가 없다. 영어의 관사는 단순하다. The 아니면 A, 게다가 '특정 대상을 지칭할땐 the, 특정되지 않은 '어떤것'을 지칭할때 a/an을 앞에 붙이는게 다다. 


네덜란드어의 관사는 한 단어와 한 몸이다. 그러니까 저 사진의 감자 'De aardappel' 에서 De는 aardappel 에서 뗄 수 없는 존재다. 네덜란드어에는 Het 단어와 De 단어가 존재한다. 프랑스어처럼 여성형 남성형이 나뉘어있는건 아니기에, 그렇다면 이 중성의 관사가 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는다. 고마워해야하나? 프랑스어나 독일어 관사처럼 지랄맞지 않은 것에? 죄송하지만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De 와 Het이 짜증나는 이유는 이게 단어 앞에 붙을 때 규칙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 많은 네덜란드어 교재들이 규칙을 어떻게든 쥐어짜내서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내가 보기엔 쓰잘 데 없는 노력이다. 규칙따위는 없다, 그냥 외워야 된다. 저 위의 사전 사진을 다시 보면 감자에서 파생된 단어들도 어떤건 de 관사고 어떤건 het 관사로 중구난방인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젯밤에 M와 내가 나눈 다정한 대화다.


나: 개는 de hond 고 고양이는 de kat 인데, 같은 포유류인 말은 het paard 고 양은 het schaap야. 왜 이렇게 중구난방이야? 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절로 분노가 차오름)
M: 그냥 느낌따라 가는거야, 어려울 거 없어. 뭔가 규칙이 있기도 할텐데...
나: 없어 그런거....새는 de vogel인데 오리는 het eind고 갈매기는 de zeemeeuw야. 이건 너네 조상들이 렌덤으로 주사위 돌려서 결정한 걸꺼야, 너네는 국민성이 로지컬 하다고 자랑하면서 왜 언어는 일로지컬하니.....
M:미안하다 할 말이 없다....



복 받은 원어민의 순수한 반응이 부럽기만 하다. '자연스럽게' 라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순진무구한 말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듯이, 내 마음에도 불길같은 질투가 일어났지만 곧 진화되었다. 어쩌겠어요, 외워야지.


 





혹자는 '네덜란드어 단어들의 대부분이 de 관사로 시작하니까, 고민될 때는 그냥 de를 붙여' 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60-65% 정도가 de 관사일 뿐이다. 대부분이 아니라 그냥 반 정도다. 네덜란드어는 대략 400,000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명사가 대부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그냥 'de'를 붙이라는 건 도박같은 확률이다. 그렇다고 De 와 Het을 배 째고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게 문장을 구성할 때 다른 규칙들에 관여를 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this 혹은 that 인 지시대명사가, de 단어냐 het 단어냐에 따라 모양이 변하기 때문이다. deze, die, dat, dit.....


여기서 독일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관사가 20개가 넘는 독일어도 있는데, 요딴 코딱지만한 변화를 가지고 징징대느냐 하고.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다시피 나는 내가 언어적으로 혜택을 받고 살아온 줄 몰랐던 철 없는 인간이기에 당연히 징징대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설명도 못한) 가뜩이나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명사들 때문에 숨도 못쉴 판국에, de나 het같은 장애물이 나를 방해하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네덜란드어의 명사 변화는 더치 문법의 중심적인 틀이기에 힘은 들어도 '어쩔 수 없지'라고 체념하게 되지만, 관사는 사실 없어도 되는 존재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 언어 구조가 이미 한국어와 영어 문법 이외에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나는 네덜란드어를 공부해야만 한다. 일단 6월에 언어 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A2 레벨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


A2레벨이 대체 뭐냐면,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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