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 까막눈의 하소연 3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잠시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적이 있다.
당시 한국 나이로 9살, 한국에서 1학년을 갓 마치고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알파벳도 읽지 못하는 상태로 학교에 던져졌지만 희한하게도 몇 개월 뒤엔 집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남긴 커다란 흑역사가 있다. 한국의 반 친구들에게 '내가 미국에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라고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나는 부모님을 졸라 편지를 썼다. 그런데편지의 서두부터 난리가 났다.
'안녕 친구들아? 하우 아 유? 어머 쏠리! 나도 모르게 영어가 나오네. 쏠리는 미안하다는 뜻이야'
이걸 다 한글로 썼다.
온 몸이 오그라드는 표현력에 기겁을 한 부모님은 이틀밤을 논의하신 끝에 내 편지를 한국에 보내지 않으셨다. 그 편지는 (다행히도) 우체통에 들어가는 대신 우리집 책장 한 켠에 남아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다.
나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지켜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한 편, 변명하고 싶은 것도 있다. 물론 내 타고난 기질에는 과시욕과 허영심이 상당하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쓸 줄 안다는 게 엄청나게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울때 모든 사람의 뇌는 필연적으로 '어머 쏠리 나도 모르게 영어가 나오네' 시기를 거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무 어렸기에 그 변화의 과정을 자가검열 없이 표현 했을 뿐이다. 그래,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항변을 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내 뇌가 '어머 쏠리' 모드로 슬슬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영어가 아니라 네덜란드어지만.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하는 한국인 유튜브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중 한 분은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 네덜란드 병원으로 이직을 하셨는데, (내게는 신 급인) B2 레벨 이상을 구사하시는 듯 하다. 그 분이 본인의 네덜란드어 공부 팁을 유튜브에 올리셨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내용이 대충 이랬다.
"예를들어 여러분 앞에 냉장고가 있습니다. 이제 이 물체는 냉장고도, refrigerator 도 아닙니다. 지구상에 이 물체를 칭하는 단어는 단 하나, koelkast 쿨카스트 입니다. 여러분이 네덜란드어 단어를 외우실때는 다른 익숙한 언어로도망칠 구석을 만드시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계의 모든 사물엔 이제부터 네덜란드어 명사가 붙습니다.'
B2 레벨 인증서는 저정도의 결단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내 일상 생활은 저 정도로 결연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실생활속에서 익숙하게 쓰는 단어들은 영어를 대체하기도 한다. 예를들어 네덜란드 이케아 웹사이트를 보며 어떤 가구를 살까 M과 이야기할때, 계속 더치 단어로 제품들을 보다보면 어느샌가 식탁 의자를 eetkamerstoel 로, TV장을 mediameubel 로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정말 무의식적으로 영어와 네덜란드어를 얼기설기 섞어 말하기 십상이다. 요즘은 특히나 두 달 넘게 더치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그런 상황이 훨씬 잦다.
예약한 미용실에서 'I have een afspraak' 이라고 말하고 3초 후에야 상황 파악을 한다던가.
M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말할 때 'come and sit met mij on this bank' 라고 한다던가.
부엌에서 쿠키를 찾으면서 'koekjes are not op de tafel' 라고 한다던가.
엘레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날씨 불평을 할 때 'yes the weer is echt slecht, right?' 라고 대답 한다던가.
(저 이웃의 복잡 미묘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더치를 잘하기라도 하면 말을 안해. 저걸 한국어-영어 사용자로 바꿔보면 거의 보그체의 실생활 버전과 마찬가지다.
'오우 그 탕수육은 너무 스파이시 했어, 난 좀 더 소피스케이티트 하고 델리케이트 한 테이스트가 좋아'
내가 혹시라도 이딴식으로 더치를 말하면 어쩌지, 겁이 난다. 내 안의 자기검열사는 내가 저럴때마다 몇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를 한차례 휩쓴 전설의 쥐쥬레갠 레이디를 소환한다.
저때 나도 저걸 읽으며 비웃었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저 케이트 언니란 사람은 언어적으로 상당히 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그 열등감이 저런식으로 잘못 표출되었는데 영원히 인터넷에 박제 되어버렸구나 (그리고 지금 나도 그 박제에 한 몫을 하고 있구나) 싶다. 물론 공감을 한다고 저 케이트 언니의 근거 없는 오만함이 희석되지는 않지만, 저 글은 아마 많은 이중-삼중언어 구사자들에게 반면교사의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영어와 네덜란드어의 언어적 위상이 한국에서 매우 다르다보니 내가 한국 친구들과 메세지를 주고 받을때 로테르담을 '호떨담'이라고 쓰거나 '소파가 아니라 방크라고 말해야 돼' 라고 우길 일은 절대 없다. 하지만 생각할 틈도 거치지 않고 나오는 저런 출력 오류 때문에 요즘 나는 0개국어 구사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저번 글을 올리고 나서 한국의 선배 D가 페이스북에 답글을 달아주신게 생각난다. 어린아이의 언어 학습 능력이 어른보다 뛰어난 이유는, 실수를 해도 책망받지 않는 환경에서 언어를 습득하기 때문이라는 걸 어딘가에서 읽으셨다고 한다. 그 답글을 읽고 느낀 게 많았다. 한 언어와 관련된 부끄러운 에피소드가 많이 생길수록 그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중이라는 뜻 아닐까. 그러니 나를 혹독하게 자책하지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혹여나 비웃지 말아야 한다고. 새로운 언어를 접하며 이리저리 부딪히는 걸음마 단계에선 어느정도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고. 요즘은 나를 조금 다독이는 중이다. 언젠가는 더치가 내 머릿속에 제 자리를 잡으면 이런 무해한 실수를 그리워 할 날도 오지 않을까?
일단 지금은 갸륵한 표정으로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 (조금은 재수 없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공부를 하는 중이다. 계속 되는 외국어 출력 오류를 수정하는 밤샘 프로그래머의 마인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