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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촌과 게토를 넘나들며(2)

by Min in Lowland



KABK 졸업 후, 그리고 M과 결혼하기 몇 달 전.

나는 내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에 스타텐콰르티에의 정든 집을 나왔다.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한 집이었지만, M과 독립된 가정을 이루기에 방 한 칸은 너무 좁았다. 당시 M은 로테르담 자우드 Rotterdam-Zuid에 있는, 비교적 최근에 새 단장한 깨끗한 플랫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결혼 후 생활이 안정되기 전까지 잠시 그 집에서 살기로 했다. 네덜란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거품이 어마어마하게 부풀어 있는 상태라 사회 초년생인 나나 M이 살 수 있는 집을 찾기가 힘들었다. 집세 대비 집 크기/청결도가 다른 집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침내 M과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기쁨에, 나는 M이 자기가 사는 동네의 치안이 좋지 않다고 경고를 했을 때 한 귀로 흘려들었다.


로테르담 자우드 Rotterdam-Zuid, 타버베이크 Tarwewijk.


나는 알았어야 했다. 한국에 소개된 서유럽의 부와 낭만이 얼마나 잘 포장되었는지, 이민자 immigrant 사회에 대한 내 막연한 상상과 연민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엑스팟 Expat 사회의 순진한 무지에 물들어 있었는지 , 지난 8년간 얼마나 편향된 네덜란드 사회에서 살아왔는지를.


그곳에 살았던 약 11개월. 고작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지만, 나는 네덜란드라는 구체의 반 쪽짜리 단면만 지난 8년간 보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네덜란드에는 란드스타드 Randstad라는, 한국의 '수도권'과 비슷하게 분류되는 도시들이 있다. 북쪽으로 암스테르담 인근, 서쪽으로 헤이그 인근, 동쪽으로 위트레흐트 인근, 남쪽으로 로테르담 인근 도시들이 란드스타드 지역이다. 일자리가 가장 많은 지역들이다 보니 당연하게도 이곳의 집값이나 월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고, 부촌과 빈촌의 격차도 한층 극심하다.


한국의 행정안전부에서 지역별 안전지수 지도를 공개하는 것과 비슷하게, 네덜란드에도 생활안전지수 웹사이트가 있다.


https://www.leefbaarometer.nl/kaart/#kaart


한국의 생활 안전 지도보다 훨씬 더 디테일하게, 각 동네의 치안, 소음, 각종 범죄 지수를 보여주는 지도다. 짙은 초록색 지역일수록 살기 좋은 동네, 짙은 붉은색 지역일수록 여러 가지로 심란한 동네라고 보면 된다. 2018년 기준이기에 매우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동네 환경이 쉽게 바뀌지 않는 네덜란드 특성상 2021년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왼쪽의 짙푸른 녹색지대가 헤이그의 부촌들이고, 오른쪽의 검붉은 곳이 타버베이크를 포함한 로테르담 자우드, 로테르담을 가로지르는 강의 남쪽 동네다. 나는 저 중에서도 검붉은 색이 가장 짙은 곳에 살았다.


슈퍼마켓조차 가난을 연상시키는 동네였다. 사는 동네의 데모그라피에 따라 슈퍼마켓 브랜드가 달라진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그 슈퍼마켓 체인은 가격이 내가 스타텐콰르티에에서 다니던 슈퍼마켓보다 쌌지만, 그만큼 제품 선택의 폭이 좁았고 무엇보다도 정말 더럽고 구질구질했다. 형광등은 드문드문 불이 나가 있었고 바닥 타일은 곳곳이 깨져있었다. 냉동고의 문은 부서져있기 일쑤였고 무엇보다도 쇼핑하는 사람들 중에 정신이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노숙인과 정상인의 경계에 있는 듯한 사람들이 냄새나는 옷을 입고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한 번은 냉동고 옆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노라니 어떤 여자가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손을 혀로 쓰윽 핥은 후 그 침이 뭍은 손으로 냉동고를 열었다. 대체 왜? 왜 그런 걸까? 이제껏 네덜란드에서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길거리는 청소부들이 다녀가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어디에나 쓰레기가 보였다. 씹고 뱉은 해바라기 씨, 치우지 않은 개똥, 콜라 캔, 패스트푸드 봉투, 음식 쓰레기, 정말 눈을 돌리면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쓰레기 무더기가 있었다. 사람들의 운전은 험악했고,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밖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경찰차가 출동했다.


그나마 코로나 전에는 낮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어학원을 다녀서 그 동네의 임팩트를 완전히 체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M과 함께 산지 6개월 만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전국적인 봉쇄가 시작되었다. 집 안에만 있게 되면서 거리뿐만이 아니라 집 자체에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이 태반인 네덜란드에서, 이 복합 주택은 방음이 너무 안 됐다. 우리는 총 4층짜리 건물의 2층에 살았다. 1층집은 그 좁은 집을 렌털 업자가 개조를 해서 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 집에서 요리하는 음식 냄새까지 났다. 그 집은 하루동일 부부싸움을 하는지 아니면 원래 크게 말하는 사람들인지 계속 사람들이 소리를 쳤다. 위층에서는 낮에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계속 나다가, 밤에는 가구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은 경찰이 윗집으로 출동을 했는데 그 집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우리 집으로 들어와 창문을 타고 체포를 한 적도 있다. (아마도 마약상이었던 것 같다.)

동북아시안으로서 그 동네에 사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차이니즈 코로나 샤우팅을 당했다. 길거리에 다니는 모두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무리를 지어 있는 남자들만 보면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월세가 싸다. 이제까지 부모님께 받기만 했으니 이제는 내가 자립해야지. 이게 우리가 지금 감당할 수 있는 월세야, 그리고 돈을 모아야지.


오로지 그 결심으로 적어도 1년은 버티자고 마음을 먹었건만, 내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 집 현관문으로 향하는 통로에 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심란한 동네라 취객이나 약쟁이가 많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침에 문을 열면 누군가가 푸짐하게 만든 피자 한 두 판이 펼쳐져있었다. 공동 현관이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결국 내가 치웠다. 꿋꿋하게.

그리고 대망의 그날. 구토로 모자랐던지 현관문을 열자 사람 똥이 보였다.


정말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금 내가 보는 게 정말 사람 똥인가 싶었는데, 사이즈로 보면 이건 동물의 대변일 수가 없었다. 비위가 약한 M은 창백해졌고, 나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고무장갑을 낀 후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울면서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아무도! 아무도 안 치우는 거야! 여기 나만 살고 있냐! 왜 나만 이걸 치우고 있어! 그리고 공동 현관에 있는 모든 집의 문을 두들겼다. M은 내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얼어버렸다. 몇몇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몇몇 사람들은 끝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대변과 고무장갑을 본 그들은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고, 이 문제를 집주인에게 리포트해야 한다 어쩌고 저쩌고 말은 했지만 정작 아무도 나를 도와 치우지는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이 동네에 계속 살다 간 내가 미쳐버릴 거라고. 빈부격차와 이민자를 포용해야지 어쩌고 저쩌고 꿈같은 이상론을 머릿속으로 펼쳐대던 과거의 내가 너무나 미웠다. 나는 엘리티스트인가? 차별주의자인가? 나는 그냥 평범하고 조용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그냥 깨끗한 슈퍼마켓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 곁에서, 깨끗한 거리에서, 신변의 위협을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뿐인데. 그게 왜 여기서는 안되는 걸까?


네덜란드에 거주 중인 한국인이 서유럽의 빈곤함을 생활 속에서 직접 겪어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유학생의 경우 이미 EU국적자보다 3배-4배가 넘는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것부터 이미 빈곤층과 거리가 멀다. 유학생들 대부분은 우범지역 거주를 웬만하면 기피하고, 또 피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한 사람들, 혹은 Highly Skilled Migrant 비자 자격으로 온 사람들은, 이미 회사 자체가 외국인 취업을 지원할 수 있는 대기업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월급은 이미 중상 수준이고, 우범지역에 살 이유가 전혀 없다.


나는 너무 순진했다. 유럽의 빈부격차를, 게토를, 너무 우습게 봤다. 심지어 네덜란드 게토는 벨기에나 프랑스, 이탈리아에 비하면 게토도 아니라는데. 내가 약해빠진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당장 여기를 떠나야 했다. 내 정신건강을 걱정한 M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사 갈 집을 찾기 시작했다. 절박한 몇 달간의 서칭 끝에 우리는 지금 사는 헤이그 근교의 작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빈촌도 부촌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이 글을 사실 쓰게 된 계기는 이름을 밝히지 않을 어떤 책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살았던 자신의 경험담을 출판한 책이었는데, 그 책의 내용에 나는 상당부분 공감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를 제한적으로 겪은 사람들이 '서유럽은 역시 빈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하게 산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를 뽐내지 않고 겸손하다'라는 말을 누군가가 할 때면 시니컬한 생각이 먼저 든다. 내가 경험한 스타텐콰르티에의 전형적인 부유층 가족의 삶과 가치관은, 로테르담 자우드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중상층 가정 사람들이, 정부 보조금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난한 이민자들을, 사회적 취약 계층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도 나는 이제 예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엄청 원대한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네덜란드 사회의 빈부격차를 르포를 쓰듯 정확하게 전달해야지 라고 결심한 것이 오히려 글쓰기를 막은 것 같다. 2021년에 이 글을 쓰다 말고 그 부담감에 글을 놓았다. 특정 동네에 대해 너무 차별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아주 컸다. 로테르담 자우드에 사는 90%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자우드에서 평생 별문제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세상 물정 모르고 오냐오냐 큰 약한 여자애가 별 것 아닌 일들에 화들짝 놀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지, 이 글을 쓰면서 자기 검열을 끝없이 하고, 글을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웠다. 그리고 나를 들들 볶는 것에 지긋지긋해진 나머지 이 글을 쓰다 말고 아예 글쓰기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오늘 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좀 더 솔직하고 단순하게, 무슨 사회 구조 분석론을 논문급으로 정확하게 써서 올리겠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내가 겪은 일만 쓰기로 했다. 로테르담 자우드와 한참 멀어진 지도 오래. 그리고 2025년 2월이 된 지금, 이제는 죄책감을 덜고 내가 겪은 일을 대부분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지 않은 지난 4년간 네덜란드 사회의 부와 빈은 격차가 더 벌어졌으면 벌어졌지 더 좁아지지 않았다. 집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이민자와 난민 이슈로 인해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극우 정당이 여당으로 들어섰다. 지난 4년간 나는 로테르담에서 일하면서도 단 한번도 자우드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하이라이즈들이 하나 둘 씩 지어졌지만 여전히 내가 살던 그 동네는 네덜란드 최대 우범지역 중 하나이고,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냥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네덜란드든 한국이든, 별 반 다를바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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