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시험에 대처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
2020.12.21 말씀묵상
[살후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그날에 닥칠 환난에 대하여 예고하시는 우리 주님의 전언이다. 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밖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믿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안으로는 거짓교사들의 왜곡이 있었다. 무엇을 믿어야할지 모르겠는 그런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딜레마 속에서 믿음을 견디는 이들에게 바울은 그것이 당연 필요한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믿음을 시험받고 장차 영광을 얻게하실 주님의 뜻을 신뢰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성도들은 그 도전에 응전해야했을 것이다.
과연 믿음의 시험이란 다른 게 아니다. 세상의 시험과는 비교되지않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있던 어떤 확고한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때 자기자신을 의지했던 모든 개인들은 멘탈붕괴를 맞닥뜨린다. 자신이 아닌 자신이 믿어왔던 게 아닌 다른 무엇을 의지할수있을지 모색해보지만 쉽지않다. 사고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은, 신뢰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일종의 죽음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매일을 무리없이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관한 기본적인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의 시험이란 우리가 공동체에서 익숙히 접해왔던 것처럼 그 스케일 자체가 남다르다. 가족이나 친구가 아프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빚을 지거나, 불치병에 걸리거나, 깊은 우울에 빠진다거나, 사회적 고발을 당한다거나..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갑자기 내게 지어지는 경우다. 그럴때 인간은 자기자신을 의지할수 없게되고, 외부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우린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늘상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지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일상의 수준이 0이라고 한다면, 삶의 지경이 100, 200으로 튀어오르는 것만을 소망하면서, 절대 마이너스로는 가지 않을 것을 단정한다. 예를 들면 좋은 대학에 붙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좋아하는 이성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자신이 사실은 심각한 질병에 노출되어 죽을수도 있게 된다는 가능성은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우리가 믿는 신념의 범위 그 바깥으로 무궁무진하게 넓다. 내가 죽을 질병에 걸리기를 소망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때, 묵상할때를 보자. 주님이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과 같이, 나의 ‘믿음’이란 시험을 능히 견디는 능력이 되는 것일까를 고민해봐야하지않을까. 평안한 일상에 녹아 없어져버리는 믿음은 세상속에서 빛도 소금도 되지못하고 버리고 밟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물론 비일상적인 위험속에서 믿음을 지켜낸 믿음의 선조들의 믿음만큼, 우리가 우리는 지금의 일상속에서 순종하고 지켜야하는 질서에 대한 믿음또한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의 연장속에 있는 내일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은 바람직하지 않다.
팬데믹시대를 살고있다. 여지껏 내가 본바로 끔찍한 자연재해조차 빗겨가는 대한민국의 수도권은 지금 전염병사태가 통제할수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례없는 일이다.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의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고있는가? 상황을 뛰어넘는 믿음의 눈을 갖고, 영적인 삶을 살고있나. 일상을 뛰어넘는 주의 은혜가 날마다 나의 들숨과 날숨을 주관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