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르륵 물속에 잠긴적이 있다
자폐세계에 머물다
꼬르륵 물속에 잠긴적이 있다. 자극하던 것들은 사라지고 고요한 적막이 귓구멍을 막는다.
세계와 문을 걸어잠구고 차단된 상태에 들어가는 것. 그 곳은 찬 바람이 들지않아서 좋았다.
세상과 나를 바라보고 생각을 연결지어나가는 것 외에 다른 자극이 닿지 않는 곳이라서 좋았다.
세계와 단절된다는 것은, 다시 우리 엄마의 아기집에 들어간 것 처럼,안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빠르게 움직여나가는 세계에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안정적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도태 될까 불안함.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외부의 세계에 위치하면서, 차단되어 있는 나를 바라보는 관점을
의식할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정수리끝까지 물 속에 잠긴 상태에서 그런 것들까지 신경쓰지는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세계는 나를 위협하는 곳이었다. 세계와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은 내게 늘 고역이었다.
마음의 문을 걸어잠구고 들어온 물속의 자폐세계는 나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 만 같았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세계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익숙해하는 사람이었다.
히키코모리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다. 사회부적응자.
그를 생각해본다. 그가 원래부터 그런성향이 있었는지, 경쟁하는 세계속에서 고립되고 좌절되기를 반복하여서 후천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태어날때부터 기본적인 성향이, 이불 속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과 걸어잠군 문과 함께 창조된 자폐세계의 존재 이유는.
세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멈추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던걸지도 모른다. 아주 느린 호흡으로,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 롱테이크 촬영을 했다.
우린 모두 사랑과 인정을 먹고 살지않는가? 자폐세계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 관심받고 싶은 마음의 절정은, 내가 타인으로 부터 관심을 받는 것을 넘어서서 나라는 주체는 사라지고 나라는 의지만 남아 나의 관심이 사물을 비추는 지경에 이른다. 그 지점에서 자아효능감은 극대화 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있더라도, 심지어 내가 그 무리 중에서 빼어난 대장노릇을 하기를 배정받았다 해도.
그것도 결국엔 어디까지나 작은 사회의 모습을 띤다. 사회는 역할을 나누어 갖는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입장을 교환하며 조율하게 마련이지. 그것조차 불만일 정도로 관심이 집중 되길 원하기 때문에, 혼자가 된다. 그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은 세계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자남은 아이는 곧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사회부적응자가 된다.
그런 아이에게 친구라는 개념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다. 위협적인 세상을 마주 하기가 두려웠던 아이는 모든 변수가 통제안에 들어오는 환경 에서야 마음이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장난감을 통한 역할 놀이였다. 즐거운 놀이라는게 결국 무엇인가. 내 마음이 즐거워야 하는 건데,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극도로 이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내가 즐겁기 위해서 오로지 나의 목소리와 나의 생각만이 가득채우는 공간을 필요로하는 것이었다.
자아효능감이 만족스럽게 발현되는, 마음이 즐거운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오롯이 내가 나로 존재할수있는 세계를 창조해야한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 정체성이 창조주로서여야만 했다. 나는 모든 변수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되었다. 창조주가 된 아이가 만족감에 이를 때 까지, 남자와 여자, 악인과 영웅, 약자, 엑스트라 등등 역할을 배분받은 피사체들은 무임금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