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밑바닥일때가 가장 자유롭다
주제 :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도전이 어렵다. 한 가지 일을 시작할 때도,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휘감싼다. 섬세하다는 장점이 있어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나 작은 일에도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보니, 어떤 일도 제대로 시작하기 어렵고 실행하더라도 만족하기 어렵다. 자신만의 기준이 높은 탓일까. 자격지심일 것이다. 무엇이든 첫술에 배부르긴 어렵고 자꾸 경험해봐야 더 좋은 것이 나오기 마련인데, 스스로의 가치기준을 너무 높게 책정한 탓일까. 사람들은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자꾸만 아무것도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마무리지어보지도 못하고 뒤떨어져간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가 도전을 했다. 더는 이렇게 살기 싫어서. 하지만 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고민도 많고 자기 기준도 높아서 여간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하나를 도전을 하더라도 첫술에 배부르고 싶었다. 이건 그 알량한 고집을 끝내 유지한 채 어렵사리 첫 도전을 마무리 지은 생각 많은 샌님의 도전기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무슨 책을 써야 멋있을 수 있을까? 멋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기준이다. 그 아주 유치하고 단순한 동기가 사람을 정말 멋있게 만들기도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하반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밝혀져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대통령 보궐선거가 이루어지는 등 대한민국의 국정 정세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뭔가 그 시류 속에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책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는 것이 없었고, 관련 내용을 책으로 쓰려면 처음부터 공부해야만 했다. 참고로 나는 애니메이션 전공이다. 그림 그리는 건 조금 자신 있지만, 시사, 정치 이슈 등에는 정말 문외한이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나는 정작 아는 것이 너무 없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구나. 마음 속 심지에 거센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올라와서 때늦은 공부를 하려면 중학교 초등학교 수학문제집부터 풀어야 하듯, 한국 정치에 대한 기초가 없으니 한국 정치의 역사부터 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한국현대사를 공부했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 이승만과 제 1 공화국부터 문재인의 [운명]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걸어온 자취를 뒤따라 밟았다.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닌데, 역사책을 쓴다고?’ 이 생각자체가 그 당시 나에게 아이러니였고, 나에게는 도전이었다. 지금도 내가 역사책을 출간했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물어본다. “아 애니메이션 전공이시니까, 책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신거군요?”, “아 역사 만화책 같은거에요?” 그러나 두 질문에 다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내 책은 페이지수가 567페이지에 달한다. 내가 처음 한국현대사를 공부했을 때 교과서처럼 참고했던 책인, 저명한 역사학자 서중석씨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가 499페이지인데. 내 책의 그 많은 페이지 수중에 그림은 거진 100페이지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글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책을 공부하고 쓰고 그리는데 장장 1년 8개월이 넘게 걸렸다. 햇수로는 3년이 걸렸다. 책 작업을 착수했을 때가 24살이었고, 출간은 26살에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지금 나도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가 밑바닥에 있는 상황을 좋아한다. 고민할 게 없이 그냥 내지르면 되니까. 밑바닥에 있을 땐, 견적을 내보고 이것저것 계산해볼 것이 없다. 모든 시도가 유효하다. 한국 현대사 책을 쓴다고 결정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중에 나온 한국 현대사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마치 커다란 벌판을 맘대로 질주하듯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고민만 많고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때의 나는 불안하고 몸이 무겁다. 그러나 발을 떼고 도전을 시작하니까 풍경이 급속도로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고민을 많이 하는 성격인 만큼, 제대로 된 결정과 시도, 행동력이 뒷받침이 되면 엄청난 ‘사기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결정에 조금만 관대하게, 지지하는 마음을 가져보길 추천하고 싶다. 디테일을 볼 수 있어 기준이 높은 당신이 발품을 팔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지천이 흔들리는 역사가 시작된다. 나를 보아라, 어린나이에 겁도 없이 역사책을, 그림과 글을 동시에 써 출간하지 않았는가. 이게 사기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사실 책을 쓰고 난 지금도 내가 아무것도 없었던 그 때와 그렇게 다르진 않다. 나는 책을 쓰고 나면 뭐가 많이 달라질 줄 알았다. 내 책은 유명하지 않고, 1000부가 조금 넘게 팔렸다. 여전히 밑바닥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유효하다. 한 번의 시도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들어주긴 어렵다. 우린 보통 tv를 통해 그런 드라마를 접한다. 오디션이나, 영화나, 예능이나 그런 데서 나오는 한 번의 시도에 졸부(졸지에 졸라 부자)가 되는. 그렇기 때문에 더 첫 술에 배 부르려고 하고, 그게 되지 않으면 쉽게 도전을 접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바로 그랬었다. 그러나 이제 느끼는 것은, 도전을 반복하는 습관이 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근거 없이 내 인생은 특별할거야 라는 드라마틱한 이상이 조금씩 깨지고, 그 사이에 근육이 붙으면서 현실에 기반 한 도전과 성취의 연속들이 기초부터 쌓이게 된다. 그렇게 세운 기둥들은 아무도 넘보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고민과 생각이 많지만, 이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그리고 실행한다. 그리고 결과치를 맛본다. 이런 삶이 요즘 나를 퍽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