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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작몽상가 Nov 21. 2020

죽음, 그 후

얼마 전 할머니는 먼 하늘을 지나 더 높은 곳으로 가셨다.


지병이 있으셨지만 나름대로 건강하셨고 아직은 정정하시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멀리 사는 바람에 장례식에도 가지 못해 당일에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연락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던 중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고... 여기 다 왔는데... 할머니 새끼들, 손주, 손녀딸들 전부 다 왔는데 우리 딸만 안 왔네..."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러니까. 나는 가지도 못하고..."라고 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돌아가신 후 위로의 말을 해야 할 때 뭐라고 해야 하지? 게다가 사실은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에 할머니의 손녀딸인 내가 포함되어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음 그런 거 같긴 한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실제로 들어야 할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는데...  물론 유가족이 나의 기도를 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말은 주로 글자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여 차마 나오지가 않았다. 직접적으로 뭐라고 해야 위로를 전할 수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릴 적에 장례식장을 가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애들이 갈 곳이 아니라며 데려가지 않았다. 이곳은 어른이 되고 어느 날부터 가야만 했던 곳이다. 배운 적이 전혀 없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가게 돼서 사실 절을 올리는 방법조차, 향을 피우는 것조차,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조차 알지 못한 상태로 무작정 가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상주나 가족분들을 보면 그냥 말없이 토닥이거나 쭈뼛쭈뼛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엄마의 친한 지인과 각별했던 사이였던 그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장례식장에 갔는데, 잘 알던 엄마 친구분을 오랜만에 장례식장에서 보는데 그 슬픈 얼굴을 하신 분에게 반가운 마음이 앞서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어버렸다. 그리고서 바로 '아 이게 아니지'싶어서 입꼬리를 내리고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거 같아서 한다는 게 "아이고"였다. 그리고 나올 때는 '수고하세요'라는 말이 나올 뻔했는데 '안녕히 계세요'로 얼른 바꿔 말했다.

엄마는 뭐라고 하는지 가만히 들어보니 "그려.. 애쓰고 잘 추슬러... 그럼, 통화하게잉"라고 했다.



장례를 다 치르고 집에서 전화가 왔다. 나를 뺀 우리 가족 4명이 오랜만에 한집에 전부 모여있었다.

국내에 사는 사람들도 한 집에 모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할머니 덕분에 모두가 모였네’

 

"너네 아빠 고아됐다"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면서도 나는 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감입니다?' , '죄송합니다?', '참 안됐네요?' 내가 아는 말로는 그런 어색한 단어들만 떠올랐다.

그래서 또 그랬다. "그러니까... 어떡한대"


누구보다 슬퍼했던 엄마였다.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 내게 전화를 걸었다.

"너네 할머니랑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지. 이렇게 일찍 가셔 버리냐... 너무 아쉬워서 잠도 못 자고 아빠랑 같이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서 울고 그랬당게”

 

할머니의 49재라도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을 했다. 집에 도착하니 거실의 장식장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내 그림이 되돌아와있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줬던 물건이 되돌아오는 일은 둘 중에 한 사람이 사라지면 일어나는 일인데...'

그제야 정말로 실감이 났다.


몇 년 전 명절에 심심해서 낙서하듯 좋은 소식 있으시라고 까치 두 마리를 그려드렸다.

"오메 우리 딸이 할매 준다고 뭔 까치를 그렸디야... 아이고... 고맙게..."

안 버리고 계속 놔두셨었나 보다. 돌이켜보니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까치 그림 외에 다른 그림을 한 번도 보여드리지 못했는데...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말이 그래서 있지 싶었다.

그리고 한번 더 다짐했다. 그러니까 숨지 말아야 한다고.


코로나 격리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간 나는 2주 후에야 가족을 만났다.

"할머니 사진 봤지?" 아빠가 말했다.

"네 봤어요 저기 뒤에 있던데. 고우시더만."


사실 나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고서 혼자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냈었다. 고생 참 많이 하시고 이제 좀 나아지려는데 가신 할머니가 안쓰럽고, 막말로 나 좀 데려가소 하는 사람은 안 데려가고 조금 더 살아보겠다는 사람은 어느새 예고도 없이 데려가는 하늘의 힘에 눌린 우리의 삶이 허무하고 무서웠다.


할머니는 정말 악착같이 사신 분이다. 그런 할머니가 답답하기도 했다. '이제는 저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는데...'

예전의 삶이 몸에 배어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우리에겐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지만 바깥에서는 굉장히 방어적이고 또 공격적으로 마치 악에 바쳐 사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애쓰며 사셨지만 이 모든 게 결국엔 떠나기 위한 것이라니...

떠나서 한 줌의 재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할머니의 모습은 절약과 근면.

같이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흩어지고 나서 할머니가 사시는 빽빽한 아파트에 가면 화장실엔 제대로 된 두루마기 화장지 하나가 없다. 할머니는 화장지에 있어서 유독 고집을 부리셨다. 늘 누구에게 한, 두 개를 얻어오거나 어디 밖에서 화장실 갈 일이 있으면 그냥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꼭 휴지 뭉텅이를 돌돌 말아 챙겨 오신다. 그래서 화장실엔 죄다 무늬가 다른 화장지가 있고, 뭉텅이 휴지가 따로따로 검정 비닐봉지에 담겨있다. 그나마 우리가 간다고 하면 검정 봉지를 한쪽으로 두고 얻어온 두루마리 한통을 꺼내서 끼워놓으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바깥의 공용품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것은 가난이 할머니에게 물려준 하나의 습관이었다.   

아프신데도 병원에 입원하면 주민복지회관에서 주관하는 공공근로를 못하게 될까 봐, 본인 아픈 것보다 그 일을 더 애석해하셔 담당자에게 곧 돌아오리라고, 자리를 남겨 달라고 단단히 부탁을 하고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편히 수술을 하러 가셨다.


 할아버지는 생활력이 없으셨다. 가난을 극복하려고 하기보다 두 손 두 발 놓고 밖으로 나가셨다. 술을 드시고, 할머니가 벌어온 돈을 달라고 행패를 부리셨단다. 자식들을 책임지지 않고 방치했던 할아버지. 그 모습은 아빠를 가장 화나게 했던 포인트였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그 모습을 닮지 않기 위해서 여태 살아오신 분 같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단순히 '집에 계시는 분이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할아버지가 다 그런 건 줄 알았다. 보통의 어른보다 더 큰 어른이 되면 바깥의 일이 정말 바쁘게 되는 건 줄 알았다.

우리가 다 함께 살 때 술을 드시고 며칠을 떠돌다가 며칠, 몇 주에 한 번씩 집에 들르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우리를 아주 예뻐해 주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할아버지가 그런 문제가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냥 '더 자주 들어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아주 미워했고, 할아버지의 모든 자식들도 할아버지를 정말 미워했다.

일명 '남의 식구'인 엄마만이 공식적으로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셨다.

"같이 살 때도 생전 나한테 안 좋은 소리 한번 하시질 않으셨어.", "그래도 할아버지가 마음이 진짜 약하신 분인데.... 심성은 고운 분이지. 나를 제일 믿어주고 그랬던 거 같어" , " 나는 니네 할아버지 안 미워. 안쓰럽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 집안에 큰 싸움이 일었다. 오죽하면 엄마는 "오늘 집에 오지 마. 선미네 집에서 자고 와.”하며 용돈을 쥐어주었다. 선미는 김제에서 전주로 고등학교를 오게 되어 홀로 자취를 하는 친구였다. 어울려 다니며 뺀질거리고 틈만 나면 그 동네에서 놀다 오려고 궁리를 하는 나에게 늘 못마땅해서 화를 냈던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달라고도 안 한 용돈이 나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할머니 집을 떠나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의 모든 어린 시절이 담겨있던 그 집을 팔게 되었다. 아빠는 그 집에 오빠가 태어나서 아장아장 걸을 때 함께 심었던 아주 오래된 감나무를 아까워하셨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집 앞에 지나갈 일이 있어서 가봤더니 감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신기하더라면서 멋쩍게 웃으셨다.  


할아버지는 그때 나온 목돈을 들고서 집을 나가셨고, 식구들과 연을 끊고 몇 년 동안 나가 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시다가 몇 년 후 우리 집을 찾아내어 벨을 눌렀다. 오랫동안 못 보던 할아버지를 마주하고 나도 깜짝 놀랐다. 엄마 말대로 정말 '거지꼴'을 하고서 오셔서 눈물이 났다. 그때 아빠는 회사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많이 나셨었다. 엄마는 말없이 할아버지가 씻게 도와주시고 속옷 가게로 후다닥 가서 메리야스, 팬티, 옷가지를 새로 싹 사서 할아버지를 깨끗하게 변신시키고 밥을 차려드렸다. "항시 엄마, 아버지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헌다"라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

그때 할아버지가 집에서 며칠 주무시고 가셨음 했는데, 오던 꼴로 밥만 드시고 다시 떠나셨다. 엄마한테 할아버지가 왜 안 주무시고 벌써 가시냐고 몇 번을 물었다. 엄마는 "응... 가신대"라고 한 게 다 였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퇴근을 하시기 전에 서둘러 가신 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은 입밖에 꺼내면 안 되는 금기시되는 사건이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할아버지는 돈이 떨어져 생활이 되지 않자 헤매고 헤매다 오신 거였고, 나가실 때는 봉투를 들고 집을 떠나셨었다는 것을. 그 이후에 그렇게 일하기를 거부하신 할아버지가 드디어 고모와 고모부가 운영하는 닭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러 가셨다는 것.

그리고 일을 힘들어하셔 안 한다고 그만두신다고 몇 번 말씀하시면서도 계속해서 하셨으며, 그렇게 몇 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 때도 할머니의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곳에 없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일상을 살아가야 하고 부재 속에 살아가는 것을 일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일은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라는 자가 대신 수행해 주곤 한다.


명절이 되면 우리는 송편을 직접 빚었다. 그 시간을 제일 기다렸다. 할머니도 다른 사촌들이 있어도 그때만큼은 나를 제일 기다리셨다. 내가 만든 송편을 보시고는 "아이고 우리 딸은 요물 조물 손도 야물어... 참말로.. 어쩜 그렇게 잘한다냐..." 하며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킥킥 웃으셨다. 엄마는 옆에 있다가 "긍게요잉 별일이네 저것은 잘하네요." 했다.

 그럼 나는 다른 사촌들 틈에서 목에 힘이 딱 들어가서는 싱글벙글 해진다. 그 말 한마디를 들어내려고 온 힘을 다 쏟는다. 송편이 모락모락 쪄질 때를 기다렸다가 모두가 모여있을 때 굳이 큰소리로 "이게 내가 한 거, 저게 내가 한 거" 떠들어 대며 뿌듯해하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만든 송편만 골라 입에 쏙 넣고 오기를 부리며 오빠는 내 송편에 손도 못 대게 고집을 부렸다. 그럼 할머니는 "으메 우리 딸이 맹근게 최고 예쁘고만잉, 글도 오빠랑 노나 먹어야제~착하지~" 하신다. 금세 기분이 좋아져 못 이기는 척 오빠에게 '내 송편'을 먹으라고 허락을 해줬다. 그게 무슨 특권인 것처럼 어찌나 기분이 짜릿하던지.

내가 처음으로 오빠를 '이기는 일'이 바로 송편 빚기였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떠나고 추억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같이 살 때 부모님이 일을 가셨고 말썽을 참 많이 부려서 할머니한테 혼난 적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니 안 좋은 기억보다 좋았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할머니가 해주셨던 그 칭찬, 그 한마디 덕분에 나는 그때부터 그나마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야.'라고 무의식 중에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숨어있던 손재주를 가장 처음 알아봐 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칭찬 덕분에, 할머니가 말한 그 '야물은 손'으로 그림을 그려내고, 글을 써 내려갈 힘이 생겼다.


칭찬이 얼마나 큰일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나의 부모님은 칭찬을 늘 아끼셨다. 잘한다고 해주면 그 말만 믿고 늘어져 안주해버릴까 봐 그랬던 걸까. 항상 '더'하기를 원하셨다. 나는 그를 단 한 번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기대치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칭찬에 인색했던 이유는 가난으로 인해 조급함 속에 쫓기듯이 우리를 키우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일이 잘 못된 방법임을 아셨던 건지 5살 터울의 막둥이 동생은 우리 때와는 모두 반대되는 방법으로 키워내셨다. 동생은 부모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받고 자랐고, 완벽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결론적으로 아주 해맑고 매사에 긍정적인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었다.   


조금 커버린 내가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별것 아닌 사소한 칭찬이란 '계속해서 살아갈 용기'를 주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의식(儀式)과도 같았다. 의식이란 '어떤 것을 시행하기 전에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부모의 품을 벗어남'을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준비되어야 할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칭찬을 받을 자격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사람에게만 있지만, 칭찬을 해줄 자격은 따로 없다. 그냥 일단 하면 된다.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 조차도.


나는 자격이 따로 주어지지 않는, 칭찬을 베푸는 사람이 될 자격이 있으며,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던 것이 생각났다.


"사람은 어릴 때 받은 사랑만큼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어릴 때 부모한테 받은 뽀뽀가 마치 포커(poker)의 칩과 같아서, 어른이 되어 사랑이라는 포커 게임을 할 때 그걸 쓸 수 있다고 했어요. 어릴 때 받은 포커칩이 많을수록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자신은 어머니에게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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