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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영 Feb 03. 2021

학점의 무게

조금 더 부드러운 마음을 위해

조교로 일을 한지 어언 1년이 넘었다.


가르치는 일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은 역시 만점짜리 시험지를 채점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점점 성장하는 것을 보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학생이 하나라도 더 배워갔으면 하는 마음에 피드백을 꼼꼼히 적어주는 편이다.


내가 맡는 수업은 대체로 대학교 새내기와 2학년을 대상으로 한 개론 수업이다. 대학교 저학년의 학생들은 3~4학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점을 훨씬 중요하게 (때로는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처럼 당연하게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도 꽤나 많다. 고등학교에서 별 무리 없이 받을 수 있었던 80점이란 점수를 대학교 과정에서 받기란 매우 어렵고, 단순히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답의 질에 따라 때로는 처참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점수를 잘 주는 편이 아니다. 문제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답이 섞여있을 경우에는 주저 없이 점수를 깎는 편이다. 물론 점수를 터무니없이 많이 깎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나의 평가 기준을 보자면 분명 대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기준은 아니다. 대학생의 내가 지금의 나를 조교로 만났어도 투덜투덜했을 것 같다.


대학교 과정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

그리고 5보다도 작은 "학점"이란 숫자는 그 존재감이 꽤나 무겁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점수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친구들이 분명 있었다. 대학을 가는 것이 인생의 정답은 아닐뿐더러, 학교 외에도 배움과 성장의 기회는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는 점수, 즉 학점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공부를 하러 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학점이라는 숫자가 꽤나 중요해진다. 원하는 과로 전과를 한다거나, 인턴에 지원을 하거나, 교환학생 또는 장학금까지. 물론 학점 외에도 중요하게 평가되는 항목이 분명히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학점으로 커트라인을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학생 때의 나는 과제마다, 또 시험마다 교수님이나 조교를 찾아가서 틀린 문제를 물어보는 학생은 아니었다. 모든 내용을 전부 꼼꼼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미 알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해보고,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자는 마인드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턴을 다니며 실무를 배우다 보니 내 능력을 넘어선 "뛰어난 학점"보다는 "배움"과 "지식"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적당히 만족할 만한 학점을 받는 것이 전제됐기 때문에 대학 생활 동안 학점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가끔은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그렇게 학점에 아등바등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학점이라는 숫자는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감정과 경험이 녹아있는 시간을 함축시켜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학교와 사회 사이에서 불분명한 미래를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던 대학교 시기에, 어쩌면 조금의 안정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도 학점이라는 숫자였다.




코로나의 여파로 작년 여름부터 시작한 비대면 온라인 수업에서 규모가 큰 수업은 워낙 인원이 많기 때문에 학생들은 마이크/카메라를 켜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학생이 대다수였고, 학생들과 직접적인 교류 없이 수업과 과제가 오가는 상황에서 화면과 과제 너머의 학생에게 인간다움을 느끼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친밀함이 없는 관계와, 채점과 점수의 입력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일"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꽤 힘들다.


학생에게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제출한 과제의 결과이겠지만, 조교의 입장에서는 10분 안에 채점하고 1초면 입력이 끝나는 한낱 숫자로 치부하고 싶은 상황도 있었다. 치졸한 변명을 해보자면, 석사 졸업논문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지난 겨울, 다가오는 프로젝트 및 논문의 데드라인과 하루에 몇 개씩 미팅과 토론모임이 잡혀있는 상황에서 시급이 그리 높지 않은 일거리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학기말 프로젝트를 대신할 10장짜리 리포트 130명 분을 채점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최대한 공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신념을 져버릴 수 없었기에 잠을 줄여서라도 채점을 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 정성을 들여 작성한 과제는 꽤 시간을 들여서 읽어보고 추가적으로 메모를 달아주기도 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부실한 과제를 채점할 때는 한숨부터 나왔다. 점수를 매기는 건 몇 분이 채 안 걸리더라도, 답을 고쳐주고 피드백을 적어주는 과정까지 포함하면 틀린 답이 많은 것이 훨씬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거의 낙제점을 받은 과제를 40분씩 첨삭해주기도 했다.


새벽 5시쯤이었을까,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버티다가 그 날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채점을 마친 과제가 있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점수가 나오는 날, 나에게 온라인으로 상담을 신청한 학생이 있었는데 바로 그 과제의 학생이었다. 전체적으로 학생의 답도 완벽하지 않았고 낮은 점수를 따지러 상담을 신청한 것도 아니었지만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본인의 예상보다 점수가 훨씬 낮아서, 틀린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과 함께 재채점을 신청하려는 목적이었다. 비록 졸음을 참으며 채점을 했지만 맨 정신에 다시 보더라도 채점이 틀린 부분은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더 깐깐하게 채점이 되어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작정하고 점수를 깎으려는 듯. 다행히 재채점 신청이 가능했기에 담당 과목 강사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인계하면서 상황은 마무리가 되었다. 상담이 끝나도 마음이 편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바쁜 스케줄로 인한 스트레스가 애꿎은 학생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얼마 전에 참가한 온라인 학회에서 작년에 교수로 임용되신 분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테뉴어 트랙**을 밟고 있는 그분은, 내가 바쁘다고 여기던 게 부끄러울 정도로 바쁘셨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강의를 계속하셨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과제의 데드라인과 출석 점수를 모두 없앴다고 하셨다. 과제를 늦게 내도 좋고 수업을 빠져도 좋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일이 있으면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갖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 때 하면 된다는 방침으로 강의를 진행하신다고 했다. 이것을 악용하는 학생들도 분명 있겠지만, 시간에 쫓기는 과제와 출석의 스트레스에서 조금은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셨다. 바보처럼 학생들을 믿겠다고.

** 테뉴어 트랙(tenure track): 교수의 정년을 보장해주는 테뉴어 심사를 받기 위한 절차.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은 정신적으로 더 힘들 것이다. 한창 들뜬 마음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은 시기에 사회생활을 금지당하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실수도 할 수 있고, 슬럼프가 올 수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시간이 조금 필요할 수도 있다. 내 신념과 평가 기준을 모든 학생들에게 공정하게 적용하는 것은 옳을지 몰라도, 때로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하는 실수를 받아줄 수 있는 부드러움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조교로서의 나는 대학생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와 대학생의 나는 무엇이 다를까? 훗날의 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기준이 매우 엄격하고 그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돌아보면, 스스로의 엄격한 기준을 다른 사람들 (특히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게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조교로서 느낀 학점의 무게는 학생으로서 느끼는 학점의 무게와는 확연히 달랐다. 같은 상황이 아니기에 같은 무게감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내가 걸어온 길이기에 먼저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목표는 여전히 점수를 잘 주는 조교보다는 정말 도움이 되는 조교가 되고 싶다. 조금 더 미래의 이미지를 상상해보자면, 매우 박학다식하고 고지식한 교수님보다는 푸근하고 허물없는 교수님이 되고 싶다. 푸근함은 마음에 부드러움이, 즉 너그러운 관용이 없다면 쉽게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부드러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가끔은 실수해도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여유가 생겨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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