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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영 Apr 01. 2021

공부하는 게 회사 다니는 거보다 좋다고?

첫 논문을 내면서

친한 친구들은 쟤 또 저러려니 하겠지만, "저는 회사에서 일하는 거보다 공부가 더 좋네요."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공부하는 게 회사 다니는 거보다 좋다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심으로 그렇다.


대학원생은 세계적으로 대차게 까이는 포지션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뼈 있는 농담이 대부분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본인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꽤나 괜찮은 직업이고, 또 그만큼 뿌듯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대학원 과정, 그리고 나아가 학계에 몸담는 것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1.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

    2. 스스로 쌓아가는 커리어

    3. 전 세계적으로 많은 전문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


** 각자의 경험에 따라, 그리고 소속되어 있는 연구실의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적일 수 있는 상황은 (예를 들어 지도교수나 연차가 높은 학생이 주니어를 갈아 넣은 논문을 낼름하신다던지..) 조금 배제하고, 실제로 듣고 겪은 것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또한, 현재 내가 소속되어 있는 연구실은 문화적으로도 한국에 있는 연구실과는 조금 다를 수 있으므로 이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1.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

직장과 비교하자면, 학교에 속한 연구실이란 환경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게 비교적 자유롭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답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답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독창성을 가미해 새로운 결과를 도출해내기도 한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접근해서 새로운 결과를 알아냈을 때의 그 짜릿함은 월급이 들어오는 순간 느끼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다른 쾌감을 준다. 이런 신선한 시도가 첫 번째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실패'에 대해서도 꽤 관대한 편이다. 실패를 발판 삼아 접근 방식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직장 또는 사업에서 프로젝트를 실패했을 때와의 리스크를 비교해서 생각해본다면, 한 두 번 떨어지더라도 받아줄 수 있는 안전망이 깔려있는 느낌이다.


반복적인 업무와 쳇바퀴를 도는 듯한 일상에 지쳐가던 내게 직장 생활은 그다지 큰 울림이 없었고,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관심 있는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환경에 와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의 해방감을 느꼈다. 대학원 단계를 거쳐 연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끝없는 배움의 연속이다. 흔히 학계를 비유할 때, 뉴턴이 인용해서 더 널리 알려진 문구를 쓰곤 한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이것은 구글이 제공하는 학술검색 서비스인 Google Scholar의 대문에 걸려있는 문구이기도 하다.

인간이 발전시켜온 지식은, 누군가의 상상력 또는 발견으로 시작해서 이론이나 학설로 굳어지고, 그 위에 새로운 발견과 이론이 만들어지면서 점점 쌓아 올려져 왔다.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마치 수많은 학자가 쌓아 올린 지식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오래된 비유이다. 한 명의 연구자로서 발아래에 쌓여있는 끝없는 지식을 전부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과 능력이 허락하는 한 우물을 깊게 파고 또 위로 하나씩 쌓아 올리는 과정이 평생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끝없는 배움이라는 표현이 퍽 적절해 보인다.


2. 스스로 쌓아가는 커리어

흔히 주인의식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직장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원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 주인의식이라는 윤리관에 반발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느꼈던 가장 큰 딜레마였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꿈의 기업을 다닌다 한들, 그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나면 과연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열심히 프로젝트를 해서 실적을 올린다 한들, 이런 실적을 외부에 알리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기업 비밀을 함부로 누설할 수 없다..!) "무슨 회사 직원 누구"가 아닌,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대학원 (더 나아가 학계)에서는 개인적으로 쏟는 모든 시간과 노력이 온전히 나의 커리어에 쌓간다. 내가 읽는 논문 하나가, 논문에 쓰는 문장과 단어마다, 이 학생은 몇 점을 줄까 고민하며 채점하는 시간이 전부 미래에 어떤 위치에 있던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HCI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회가 바로 CHI이다. 영향력을 나타내는 수치인 h-index가 꽤나 높다.

최근에 석사학위 졸업논문을 다듬어서 제출한 논문이 HCI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회인 Computer Human Interaction (줄여서 CHI, '카이'라고 부른다.)에 붙었다. 전에 참여하던 프로젝트로 쓰인 논문에도 이름이 올라가긴 했지만, 당당하게 내 이름을 1 저자로 걸고 출판하게 되는 논문은 처음이다. 참고문헌까지 포함해서 총 15페이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논문이지만 2년간의 석사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기에 애착이 가고, 꽤 의미 있다.

초안을 작성하고부터, 교수님께 첨삭을 받고 수정하는 과정을 최소 20번 이상 거쳤다. 그만큼 꼼꼼하게 준비했고, 자신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얻은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작은 의문부터 시작해서 직접 참가자를 모으고, 방문해서 인터뷰를 하고, 결과를 분석하여 만들어낸 1 저자 논문이라는 결실을 맺는, 정말 소중하고 값진 경험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


개인적으로 대학원의 꽃은 논문과 학회라고 생각한다. 특히 논문은 단기간에 쉽게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며, 얼마큼 신경 써서, 정성을 들여서 썼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영향력이 큰 학회일수록 심사 기준이 더욱 까다롭고, 훨씬 많은 사람이 참석하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시각에서 비판이 들어온다. 따라서 논리적, 방법론적으로 조금이라도 허술한 틈이 있으면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된다. 양적 연구에 비해 논문의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질적 연구의 논문들은 문체가 깔끔하지 못하거나, 근거가 부족해 설득력 없는 주장을 펼치면 바로 날카로운 비판이 꽂히기에 (리뷰 단계에서는 익명이긴 하지만) 본인 이름을 걸고 출판하는 논문에 대해서는 스스로 더욱 엄격해져야 하는 것 같다.

** 적 연구로 작성하는 논문에 대해서는 이후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3. 전 세계적으로 많은 전문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

본인의 이름을 걸고 쌓아가는 커리어는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며 채찍질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 전 세계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어떤 연구를 했는데, 저 멀리 바다 건너 다른 나라 연구실에서 같은 주제로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했더니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다면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엎어질 수도 있다. (물론 질적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흔하지 않다.) 반대로, 좋게 생각하면 때로는 선의의 경쟁으로, 때로는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협업 파트너로 받아들인다면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파트너십을 글로벌하게 만들어갈 기회가 많다는 점도 대학원 생활이 꽤나 즐거워지는 동기가 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학회에 참석해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연구발표를 듣고, 서로 의견을 나눌 기회가 일 년에 몇 번 이상씩 있다.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연구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생산적인 피드백을 주고받고, 다른 연구자들에게서 격려의 말을 듣는 기분도 짜릿한 성취감 못지않은 대단한 감동이다. 발표가 끝난 후에도, 논문이 출판되면 온라인으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기에 종종 연구에 관심이 있다는 이메일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동료이자 멘토가 전 세계적으로 생기는 경험은 회사나 기업 안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2015년도 CHI는 서울에서 개최했었다.

매년 학회를 참가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보통 학회가 끝나고 나서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고 짧게 여행을 한다. 대부분 스케일이 큰 학회는 매년 다른 곳에서 열린다. CHI만 하더라도 2017년에는 미국 덴버에서, 2018년도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019년에는 영국 글라스고에서 열렸다. 작년에는 하와이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바뀌었고,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은지라 아쉽지만 올해 일본 요코하마도 놓치게 되었다. 현재 코로나 시국에서는 거의 모든 학회가 온라인으로 열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온라인으로 교류하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너무 딱딱할 수 있는 발표나 토론이 갑자기 난입한 반려동물로 인해서 조금은 부드러운 분위기가 되기도 하고, 일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배경화면 덕분인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알게 모르게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학원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울 수 있다. 경제적인 부분은 조금 아쉽지만 이 부분은 장학금이나 연구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본인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스로 쌓아가는 커리어의 연장선이다. 물론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몇 년 동안이나 비슷한 주제로 답이 없는 고민을 해야 한다는 부분은 분명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연구실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대학원은 (특히 박사과정은) "자기 절제 및 희생 (self-denial)과 자발적 동기부여 (self-motivation) 그리고 자아 발견 (self-discovery)로 가득하다."


Ph.D. program is full of self-denial, self-motivation and self-discovery.

포기하게 되는 것도 생기지만 그것조차 잊게 만드는 비전이 있고, 학문적으로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있기에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 대학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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