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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13.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몸이 멀어지면 마음은 진실해진다

 갑상선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병원은 지하철로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서로 간의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문구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코로나 감염 추이를 보더라도 최고의 수준인 거리두기 3단계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교회의 집단 감염은 물론 노래방, 클럽, 목욕탕, 스케이트장 등에서의 수많은 인파라니……. 게다가 거리두기가 조금 느슨한 지방으로의 이동은 또 무엇인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많은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기야 몇 안 되는 내 가족도 통제가 잘 안 되는데, 국민 모두를 어떻게 다 통제하겠는가! 그래도 이 지옥 같은 코로나 시대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면 우리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똘똘 뭉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집콕 생활을 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물론 거리두기가 다소 완화될 때는 가끔 외식도 하고, 지인들과 카페에서 수다도 떨고, 아이들이 등교할 때는 잠깐이나마 혼자만의 자유도 누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 같아선 오히려 나가는 게 더 귀찮을 정도다. 솔직히 이 시국에 외출도 그다지 재미가 없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스트레스가 크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가야 하는 학교, 학원에 대한 압박감과 복잡한 친구 문제, 그리고 경쟁심리 등이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인 나도 솔직히 편한 부분은 있다. 아이들의 짜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번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득과 실은 분명히 있었다.


 요즘 거리를 나가 보면 너무도 조용하다. 매번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장사가 잘 되던 가게들도 입구부터 적막감이 감돌고, 하루가 다르게 폐업하는 가게들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예전, 한창 손님들로 북적였던 그 상가들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은 횡 한 상가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임대’라는 안내문과 함께. 마음이 참 아프다. 희망차게 아침을 열던 그분들은 지금 다들 어디에 있을까? 부디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이 시기를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도 거리두기 격상으로 인해 생계조차 막막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국민 모두가 힘을 합해 하루라도 빨리 이 시국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 또한 시급하다. 이처럼 코로나 시대에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건 단연코 경제적인 부분이다. 특히 누군가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생계유지조차 힘든 상황일 테니까 말이다.


 반면 코로나로 인해 좋은 점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이다. 그동안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사람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지친 부분들이 거리두기를 통해 저절로 선이 그어지고, 정리가 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모임으로 인해 꽤 바쁘게 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오프라인 모임을 각종 온라인 모임이나 줌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를 통해 다소 꺼려졌던 오프라인 모임에서 슬쩍 발을 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비대면 사회가 끝이 나고, 다시 대면 사회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불필요한 모임이나 관계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지인은 이번 코로나를 통해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함을 찾았던 것 중의 하나가 명절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시댁 식구들과의 비대면으로 인해 그나마 쌓인 분노가 다소 누그러졌다는 얘기도 서슴지 않았다. 솔직히 나 같은 경우도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크다. 분명, 지금 시대는 21세기 최첨단 시대인데, 시댁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 옛날,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장남, 장손, 큰며느리, 제사……. 내 남편은 장남이다. 그래서 나는 저절로 큰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아들 역시 저절로 장손이 되었다. 사실 어느 시점까지 남편과 난 장남과 큰며느리라는 감투를 쓴 채 압박감을 상당히 많이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둘째 녀석에게는 절대로 그러한 압박감을 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물론 둘째 녀석은 부모가 장남이라는 감투를 씌운다고 해서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그런 착한 자식도 못 된다.


 또 이런 얘기를 듣기도 했다. 혹독한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자칫 생계도 막막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떤 지인은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다. 어느 날, 제삿날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시어머니가 그 지인에게 제사를 떠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그동안 시댁 문제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데다가 코로나 사태도 벌어지고……. 거기에 제사 문제까지 거론하는 시어머니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정들을 꾹꾹 눌러가며 참아왔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시어머니를 향해 한마디 쏘아붙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제게 물려주실 거라곤 오직 제사밖에 없으신가요?”라고.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봤다. 아마 돌아가신 조상님들도 후손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자신이 먹을 밥상을 서로 싸우면서까지 챙기기보다는 소박한 밥상, 아니 안 먹어도 괜찮으니 후손들이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바랄 것이다. 나도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지. 난 아마도 나로 말미암아 자식들이 싸울 수 있는 소지들을 다 차단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조상이 남기고 간 불합리한 일들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제사 문제로 인해 가족 관계가 깨졌다는 얘기들을 수없이 들은 바 있다. 그래서인지 허례허식과 형식 위주의 제사 문화는 왠지 거부감이 생긴다. 정작 중요한 건, 보이기 위한 겉치레가 아닌 진정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 옛말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무 하나를 보더라도 가까이서 바라보면 어느 한 부분만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나무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든, 어떤 문제든 간에 가까이서 바라보면 어느 단면만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주변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번 코로나를 계기로 일정 거리두기를 해서인지 불필요한 것들이 나름 정리됐다고 한다. 그것은 대부분 기존의 불필요한 인간관계, 그리고 기존의 불합리한 문제들로써 결국 진실된 부분만이 삶의 가치로 남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번 코로나를 통해서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거리두기로 인해 비록 몸은 멀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마음은 오히려 모든 불필요한 거품들이 싹 빠져나간 듯 홀가분하고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중요한 건, 반드시 함께 해야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내 마음속에 그 누군가가 생각나고, 그립고, 행복하고, 또 그 누군가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결코 인간관계는 수치적 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일 게다. 늘 가까이에 있어도 마음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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