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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근몬스터 May 11. 2021

제 키는 178.3cm입니다

프롤로그

  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는 자리가 생기면, 그 전에 굉장히 긴장한다. 낯을 가리는 탓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내 키가 '대한민국 여자'치고는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나를 실제로 본 적 없는, 사진으로만 내 모습을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자리라면 긴장감은 두 배가 된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98.726%의 확률로 내게 말한다. "사진으론 전혀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키가 굉장히 크시네요... 키가 몇이세요?"


  "여자치고 굉장히 크다" "운동 선수하지 왜 안 했냐" "혹시 농구나 배구 같은 걸 했었냐" "남자친구 만들기 힘들겠다" "부모님이 키가 크시냐" "모델에 도전해보는 건 어떠냐" 등등등. 이것 말고도 나는 키에 대한 질문을 태어나서 오버 조금 보태 일만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키에 관한 질문들 사이에서 은근히 '키 큰 여자는 별로다'라는 식의 말들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친할머니조차 우스갯소리처럼 내게 툭툭 내뱉곤 했다. "더 이상 크면 안 돼. 여자가 너무 커도 꼴보기 싫다."


  나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여자는 크면 좋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꼬리표처럼 하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나보다 키가 큰 남자애들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 내 키는 163cm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금처럼 키가 더 커질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그리고 이 키로 인해 내 인생이 앞으로 얼마나 고단해지고 짜증나게 될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키가  멋진 여성 분들도 세상에 많다.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키가 178cm 정도의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여성 분들은 대부분 모델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고, 얼굴도 매력적이며 끼가 넘친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공통점이라고는 키가 크다는 것과 인간 여성이라는  밖에 없을 것이다. 키가  여자를 보며 멋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멋있는   여자' 모델처럼 늘씬하고 옷핏도 작살나는 그런 여자들일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대한민국에서 마르지 않고 예쁘지도 않은 키 178cm 여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내가 아직까지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키에 대한 트라우마와 자존감에 대해 스스로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나는 내 큰 키가 아주 조금은 좋고, 좋아하는 마음에 비해 훨씬 크게 증오한다. 웃기게도 '애증'의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글로 내 경험과 생각을 정리해가면서 '애증'의 두 글자 중 '증'자를 조금 옅어지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실 완전히 내 키를 사랑하기란 나에겐 굉장히 어려운 길이 될 거 같다.) 얼마나 글을 써나갈지도 모르겠고, 내 키를 사랑하는 마음이 올라갈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시도는 해보고 싶어졌다.


  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이유로 그 누구보다 내가 앞서서 내 외모를 증오했던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조금 더 내 키에 너그럽고 관대해지고 싶다. 그리고 내 스스로 나를 깎아먹고 싶지 않아졌다. 이 글은 그 시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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