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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근몬스터 May 13. 2021

제발 어깨 좀 펴고 다녀라

어깨를 펴지 못하는 초등학생 이야기

  "너는 나이도 어린데 왜 그렇게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냐? 아빠처럼 이렇게 어? 어깨를 똑바로 펴고 걸으란 말이야." 내가 초등학생 때, 아빠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잔소리 중 기억에 남는 잔소리는 바로 "어깨 좀 펴고 걸으라"는 거였다. 지금은 의식하면서 어깨와 허리를 항상 펴고 걷고, 앉아 있으려 하지만 (오래 살기 위해서...) 그 시절 나는 어떻게서든 작아 보이고 싶었다. 어깨를 펴고 걸으면 안 그래도 큰 덩치가 더욱 커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아빠는 틈만 나면 내 자세를 보고 잔소리를 해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갑작스러운 사고와 수술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게 되면서, 내가 안쓰러웠던 부모님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전부 사다 주었다. 피자, 스파게티, 치킨 등등... 나는 그 때를 계기로 살이 급격하게 쪘었고, '여자' 초등학생치고 큰 키에 큰 덩치를 가진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살은 지금까지도 빠지지 않은 듯 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에서 제일 컸던 나를 보며 담임 선생님은 "너 정도면 나 업는 것도 가능하겠다"하고 반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내 등에 업히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업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선생님을 업었고, 그 선생님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나이가 50이 넘은 중년 남성이었다.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엄청나게 화를 내며 선생님에게 따졌고 그땐 어려서 몰랐지만 그 선생님은 참으로 몰상식한 사람이었구나, 싶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돼서야 나는 또래보다 큰 덩치를 가졌다는 걸 느꼈고, 남자애들도 나에게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ㅡ 확실한 건 그 남자애들은 모두 나보다 덩치가 작았다. ㅡ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조폭마누라'라면서 도망갔고, 조별로 학급 신문을 만드는 시간에 남자애들만 모인 조는 '가장 재수없는 여자애'로 나를 꼽았다. 아직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발표를 듣는 순간 터질듯이 새빨개졌던 내 얼굴과 그 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꺄르르 웃어 댔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죽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래서 여자인 친구들이랑은 사이가 좋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건 내 외모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생각해서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흔한 단짝 친구 한 명 없는 초등학생이었고, 그 시절부터 나는 '인간 관계는 너무나 어렵구나'하고 깨달아버린 어린이 중 한 명이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잊고 살았던 트라우마가 생각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혹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언젠가 한 번은 꼭 시간 내서 봐주었으면...) 그 당시 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나쁜 친구들은 아니었다는 걸 지금은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때의 친구들에게 나는 그저 '같이 다니긴 싫은' 아이였던 거 같다.


  그래서 이런 저런 복합적인 이유로, 나는 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안 좋은 자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어깨를 똑바로 펴고 걷기가 정말 힘들었다. 아빠의 잔소리를 들을 때면 잠깐 어깨와 허리를 곧게 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구부정하게 하기를 반복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어깨를 펴고 걷든, 구부정하게 걷든 남들은 나에게 관심도 없었을 텐데. 어렸을 때의 나는 그렇게라도 덩치가, 키가 작아보이고 싶었나보다.


  그 이후로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는 항상 안 좋은 자세로 생활하게 되었다. 물론 내 안 좋은 자세의 원인이 백 퍼센트 키는 아니겠지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십 대 후반인 지금에서야 어딜가나 어깨를 곧게 펴고 다니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타임머신을 쓸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어린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깨 펴고 다녀도 괜찮다고, 그걸로 아무도 너를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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