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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근몬스터 Dec 22. 2020

02. 천재가 진짜 승리를 향해 가는 길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스 갬빗> (2020)

나는 어느 분야에서도 딱히 두각을 드러낸 적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다. 어렸을 적, 만화에 빠져 살았던 시절에 만화 공모전에서 금상을 타본 적도 있지만 재능이 있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화가의 꿈을 접고 패션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꿈이 생겼지만 그것마저 입시 미술에서 한계를 느끼고 포기했다. 그 다음 꿈은 드라마 작가였고, 24:1을 뚫고 소설 전공으로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지만 신은 나에게 글쓰는 재능을 주지 않았다. 결국 글 쓰는 일과는 무관한 직장에 들어와 일을 4년이 넘도록 하고 있고, 앞으로도 평생 글쓰는 것으로 내가 벌어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명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느 한 분야에서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최고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종종 상상해 보지만 아득하기만 하다. 본인에게 없는 것을 보통 집착하듯이 내겐 '천재'라 불릴만한 재능이 없기에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부분도 있다. 나에게 없는 (...) 어떠한 '지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인물에게 나는 호감을 느끼는데, 그런 나에게 눈에 띈 인물이 있었다. 바로 드라마 <퀸스 갬빗>의 '베스 하먼'이었다.


퀸스 갬빗 :
백이 폰 하나를 일시적으로 희생함으로써 포지션에서의 이점을 가져가려 두는 체스 오프닝 중 하나.


주인공 '베스 하먼'은 어린 나이에 부모(정확히 말해서 홀로 자신을 키우던 어머니와 그녀를 원치 않았던 아버지지만)를 잃고 보육원에 맡겨진다. 숫기도 없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달리 조용했던 그녀는 우연히 보육원의 관리인인 '샤이벌'씨가 두고 있던 체스에 관심을 보인다. 흑과 백의 말을 가지고 머리로 싸워야만 하는 체스. 베스는 체스라는 게임에 엄청나게 빠져들게 되고 샤이벌은 그녀의 대국 상대가 되어주며 베스의 재능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으레 '천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의 전개가 그렇듯 '베스'는 소규모 체스 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체스 대회를 제패하며 남자들만이 해먹던 체스계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냉전 시대, 지금보다 더욱 견고했던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베스는 기죽지 않고 체스를 연구하고, 복기하고, 공부하며 이긴다.


하지만 베스가 그저 탄탄대로로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중독되었던 신경 안정제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일상을 살았고, 알코올 중독이던 양어머니가 죽고 나자 자신의 불안감과 고독을 채우기 위해 그녀 또한 알코올에 빠져든다. 언뜻 보면 그녀의 곁에는 체스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베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항상 그녀를 지지하고 이끌어주는 관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처음엔 그녀에게 체스를 알려준 샤이벌이, 그 이후엔 단순히 상금을 얻기 위한 응원이었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유대를 쌓고 그녀를 지지해준 양어머니가 있었다. 그녀가 처음 이긴 챔피언 해리, 그녀가 놓쳤던 부분을 알려주며 심화된 체스의 세계를 열어주는 베니까지. 베스는 자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베스는 항상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누군가와 함께하며 체스부터 일상까지 긍정적인 효과를 얻는다.


사실 천재라 함은 항상 고독하게 느껴지는 위치에 있을 것 같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이기에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양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고 샤이벌의 죽음에 동요했던 베스 하먼도 결국은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무심히 보면 베스는 감정이 없는 얼음여왕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니다. 승리를 향해 가는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존재했다. 베스는 어느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할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 존재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그녀는 주위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다시금 일어선다.


나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 더욱 좋았던 것 같다. 나 또한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무언갈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하지 않는 탓에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주변 사람들이 있어서,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를 이제껏 사랑으로 키워준 엄마가, 항상 아픈 손가락인 동생들이, 나를 똑부러지는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같이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해주는 애인이 있어 나는 앞으로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베스 하먼'과 나는 전혀 동떨어진 인물이지만 이런 부분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를 더욱 응원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안야 테일러조이'가 연기한 주인공 '베스 하먼'이 너무나도 멋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오로지 '체스' 하나만 생각하고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퍼부으며 집중하는 면이 너무 멋있었던 거 같다. (나에겐 그런 끈기와 의지가 부족하기에...) 또한 60년대가 배경인지라 그 당시 시대를 반영한 듯한 베스의 패션도 굉장히 좋았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이 드라마를 시작하기에 한 가지 진입 장벽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체스'라는 소재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체스를 몰라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체스를 두는 그 순간의 긴장감, 긴박함 등은 카메라 클로즈업 숏이라던지, 시계 초침소리라던지 하는 연출적인 부분에서 잘 느껴져 재미 또한 놓치지 않으니 체스라는 소재에 겁먹지 말고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꼭 도전해보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차에서 내려 거리를 걷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흰 자켓을 걸치고, 거리에서 체스를 두던 노인들과 어울리는 베스.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녀를 계속해서 응원할 것 같다. 올해 내가 본 넷플릭스 작품 중 1위로 꼽고 싶은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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