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소비 성향 체크리스트라는 것을 마주한 적이 있다. 적힌 항목들을 살펴보며 나의 습관을 반추해 본다. 옷은 유명 브랜드 제품으로 사는가? 에이블리, 지그재그 없으면 못 산다. 택시를 자주 타는가? 해당 없음. 배달 음식을 자주 시키는가? 월에 3-4번 정도. 술/담배/커피를 하는가? 술은 월에 1-2번, 담배나 커피는 안 마심. 할부를 자주 하는가? 웬만하면 안 함. 간간히 뜨끔 거리는 질문들이 있긴 하지만, 체크리스트만 봤을 때는 소비 습관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월급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월세가 많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명품을 소비하는 것도 아니며, 배달 음식이나 맛집에 관심도 없고, 심지어 주 2회는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데. 이런 의문이 생길 때마다 카드 내역서를 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다 내가 쓴 게 맞구나. 티끌 모아 티끌인 줄 알았더니, 정말로 태산이구나. 그리고 그 티끌 같은 돈을 어디에 쓰는지 보다 보면 언제나 답은 하나로 나온다. 전부 나의 덕질 때문이다.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지만 불경기에 지갑 여는 건 덕후들 뿐이라, 인기 있는 IP라면 팝업이고 제품이고 연전연승이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옷을 좋아해서 꽤나 자주 사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내 옷장에서 가장 비싼 옷은 야구 유니폼이다. 3만 원짜리 옷 사는 데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하지만, 13만 원짜리 유니폼 사는 데는 알람까지 맞춰놓고 오픈런을 한다. 유니폼이 리뉴얼되어서, 캐릭터랑 콜라보를 해서, 선수의 기념 유니폼이라서, 갖가지 이유를 대다 보면 유니폼이 몇 벌씩 생긴다. 일 년 중 이 유니폼들을 입는 건 5번 정도 될까. 그럼에도 돈이 아깝지는 않다. (야구를 못할 때면 화가 날 뿐이다.)
덕후는 좋아하는 영화도 한 번으로 만족을 못한다. 일단 일반관에서 한 번 보고, 그다음엔 4DX나 아이맥스 같은 특별관에서 한 번 더 본 다음, 그다음 주엔 특전이 좋아서 한 번 더 본다. 다 보고 났더니 영화의 원작이 너무 궁금해져서 원작까지 사버린다. 그러다 보면 알고리즘은 귀신같이 굿즈 소식이나 팝업 소식을 피드에 띄우고, 그러면 덕후는 또다시 홀린 듯 지갑을 연다.
좋아하는 공연도 '올콘'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똑같은 세트리스트를 가진 똑같은 공연을 왜 몇 번씩 보냐고 묻는다면, 그날의 조명, 온도, 습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어느 날은 팬서비스가 기가 막히고, 어느 날은 라이브 애드리브가 기가 막히고, 또 어떤 날은 앵콜 곡이 바뀌는 짜릿함도 있다. 내 최애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 욕심. 최애를 향한 사랑은 커지지만 어느새 지갑은 얇아진다.
누군가는 묻는다. 유니폼 하나만 사면 안 돼? 영화 굿즈는 어디다 쓰는 건데? 공연은 한 번만 보면 안 돼? 누군가에게 소비의 기준은 재화의 기능성이다. 전자제품, 자동차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브랜드 가치를 우선으로 삼는다. 소위 말하는 '명품'이 그렇다.
그렇다면 오타쿠들에겐 무엇이 중요할까. 바로 마음의 안정이다. 기능이 좋아서, 브랜드 가치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이 소비를 하는 그 순간을 즐기고 싶어서 돈을 쓴다. 마음의 풍요. 풍족한 마음을 위한 소비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