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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비

<소비>

by 빈부분

누군들 안 그렇겠냐마는, 나는 소비하는 것을 좋아한다. 의식주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만 하는 소비 말고, 그 소비가 나의 삶을 사치(positive)스럽게 만드는 것일수록 행복을 느끼고 더 높은 가치를 두게 된다. 꽃, 케이크, 빛, 공연, 차, 새벽, 제철, 노을같이 찰나의 시간밖에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소비할 때 삶이 더 풍성하고 살아갈 만한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것을 소비하는 일은 특히 더 좋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좋은 공간이나 도자기, 조금씩 변하면서도 한결같은 풍경 같은 것들은 보고 또 보아도 닳아 없어지지 않아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소비라고 하면 대체로 돈을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돈 말고도 많은 것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다. 닳아 없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물건의 소비, 시간의 소비, 노력과 체력의 소비, 세포의 분열 같은 것들도 어떤 의미로는 소비니까, 결국 살아 있는 것들은 모든 순간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셈이다.


어떤 소비를 좋은 소비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건넨 것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만족도가 큰 것일수록? 그렇지만 아무리 계획을 열심히 짜서 소비를 하더라도 그에 따라오는 만족도는 늘 어느 정도 불확실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소비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가치가 있기도 하거니와 맞바꿀 수 있는 대가의 크기에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성비 좋은 소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열심히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그것 또한 되려 낭비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재화적 소비를 계획적으로 하지 못하는 까닭에 지나간 소비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른스럽지 못하게도 한 달의 카드값을 대강 유지하는 정도의 감각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근일이 년간 가장 잘한 소비를 꼽으라면 처음으로 구매해 본 기계식 키보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한번 사서 써 볼까,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구매했는데 이렇게 오래 즐거울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입문용으로 적당한 가격대인 데다가 무소음 축으로 귀가 예민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훨씬 편안한 기분으로 글을 쓰거나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키캡의 색이 튀는 바람에 모든 면에서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작년 초부터 잘 한 소비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의 소비 목록들을 돌아보면, 좋은 소비는 결국 생산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스트레스의 해소나 비어 버린 마음의 충족, 좋은 경험의 축적,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마음과 몸을 조금 더 건강하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 다시 흙으로 돌아갈 날에는 돈이든 시간이든 쥐고 갈 수 없으니, 건강하게 쓰다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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