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진 기록, 취약함, 여성성에 대하여
살살 뛴다고 뛰었는데도 심박수가 금세 130에서 140까지 요동쳤다. 좀 더 느려지기 위해 나를 멈춰 세웠다. 더욱더 못 달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 달리기는 ‘zone 2’ 달리기 훈련법이다. 심박수의 다섯 구간 중 zone 2에 해당하는 심박수, 즉 최대 심박수의 60~70%를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달리는 훈련이다. 부상 위험을 낮추면서도 운동 능력을 향상시켜준다는 게 이 훈련의 요지였다.
나의 zone 2 심박수에 해당하는 110~130 bpm을 유지하면 빠르게 걷기에 가까울 정도가 되는데, 달리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양새가 어색해서 계속해서 힘을 빼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치 못한 불편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자꾸만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이렇게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 앞으로 보낼 기세였다. 앞사람을 추격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지금껏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유치한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나 원래는 더 잘 달릴 수 있는데….’ 이렇게 맥 빠진 달리기는 좀 나약해 보이는 거 아닌가? 트랙 위에서 약해 보이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에게?
재능 없이 하는 달리기, 수행으로서의 달리기는 내가 지향하는 바이지만 트랙 안에서 스포츠적 사고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동네에서 하는 생활 체육이라도 트랙에는 미묘한 경쟁적 기류가 감돌고, 러너들이 제각각으로 달리는 모습이야말로 내게 가장 자극적인 풍경이다. 매번 홀로 수행하듯 달릴 수는 없어 가끔은 경쟁적 기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 뒤를 바짝 쫓는 속도에 따라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거나, 내 앞의 베테랑 러너처럼 빠른 박자에 맞춰보기도 한다. 내 이중적인 마음은 이런 식이다. 달리기 자체로 오늘의 행복감을 얻으면서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실력에 시무룩해지고, 어쩌다 나쁘지 않은 기록이 나오면 그제야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하다’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나의 ‘뒤처진 기록’은 모두 누락된다. 트랙 위에 놓이는 것 자체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꽤 오랜 시간 동안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는 내게 우월감을 줬다. 워낙 약한 몸과 정신으로 살다 처음 맛보게 된 강인한 느낌은 나를 도취시켰다. 트랙 위의 저 남자들만큼 강하고, 저 남자들만큼 거침이 없다는 느낌. 그러나 우월감은 자연스레 열패감을 동반한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낙오시킨다. 트랙 위에서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그런 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간편하게 남들을 향하기도 한다. 낙오되는 동시에 타인을 낙오시키면 나를 적당한 자리에 위치시키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다 최근 일이 년 사이 내 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늘어난 체중으로 몸은 무거워지고, 전만큼 속도도 나지 않는다. pms (월경 전 증후군) 증상은 생물학적 노화와 함께 다양해져서 복부부터 잇몸까지 여기저기서 통증이 자기주장을 한다. 역시나 월경 주기와 관련 있는 편두통 때문에 운동할 수 있는 날도 한정적이다. 도태된 것 같은 느낌은 여성 된 나의 몸과도 어느 정도 관련 있었다. 체지방, 낮은 근육량, pms 기간의 무겁고 피로한 몸 등. 7년을 달렸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말을 듣지 않는 내 몸은 직선적 성장이라는 스포츠적 사고를 완전히 거스르고 있다.
미국의 장거리 달리기 선수 로런 플레시먼의 회고록 <여자치고 잘 뛰네>에는 남성 중심의 스포츠 시스템 안에서 불화하는 여성 선수의 고군분투기가 담겨있다. 가장 놀라웠던 대목은 여자 선수들에게 사춘기가 ‘회복할 수 없는 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사춘기 이후로 남녀의 운동 수행 능력은 급속도로 차이가 생긴다.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몸, 월경하는 몸은 스포츠에 제약이 되기 때문에 여자 선수들은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성이라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극단적 식이 제한은 섭식 장애와 잦은 부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남자 선수들처럼 꾸준한 성과를 내기 어렵게 만든다. 한 달 주기의 신체 변화를 겪는 여자 선수들의 생물학적 조건은 선형적 성장이라는 남성 표준의 스포츠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 선수처럼 된다는 것은 경기력 향상, 우월함, 권력으로 이어지므로 여자 선수들은 여성성을 열등한 것으로 내면화한다.
Pms로 확연히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달릴 때, 가슴을 잘라내고 싶은 기분일 때, 좀 더 잘 달리기 위해 체중을 감량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느린 달리기를 수행하는 내 몸이 답답할 때가 떠올랐다. 내가 느린 달리기 기록을 누락시킬 때면 나의 여성성 또한 열등한 것이 되어 함께 누락됐던 것이다. 내가 동화됐던 동네 트랙의 기류는 결코 내가 따를 수 없는 다그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열을 가리고, 목표에 도달하고, 우상향 그래프를 타고 가는 이야기는 더 이상 내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몸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거나 출산 후유증, 질병으로 운동할 수 없는 내 주위 여자들 사이에서 나는 건강한 몸으로 취급되지만, 동시에 주기적인 편두통과 잦은 신경통으로 인해 나는 몸의 취약함을 동시에 느낀다. 어떤 날은 취약하기 때문에 달리지만 다른 어떤 날은 취약해서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왔다 갔다 하는 내 몸은 결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완전히 건너갈 수 없다.
처음 경험한 zone 2 달리기는 충분히 힘을 비축하면서 조금씩 꺼내어 오래 쓰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한 시간을 내리 달렸는데도 통증과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처음 오해했던 것처럼 약하거나 뒤처지는 일이 아니었다. 취약함을 누락시키지 않고, 취약함을 껴안은 채로 달리기였다. 느린 속도를 의식하며 달리는 동안 지금껏 ‘강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을 재정의할 필요를, 전복시키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