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침놀 Nov 25. 2021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당신의 도서관

“삼십오 년째 폐지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당신의 도서관

한타, 당신의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조명도 없고 등이 편한 의자도 없지요. 당신의 모습이 보여요. 당신은 미사를 드리는 신부처럼 폐지를 압축해요. 가끔은 쥐들과 파리떼가 성가시게 하지요. 하지만 당신은 단어와 문장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걸핏하면 책을 읽는다'고 상관에게 주의를 들어요. 폐지는 쌓여가는데 책을 살리고 있는 당신이 상관은 미웠겠지요. 천장에서는 매일같이 엄청난 분량의 책이 쏟아져 내려요. 칸트나 괴테, 실러나 니체, 노자와 헤겔… 당신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고 말했던가요? 당신이 35년 동안 쌓아 올린 당신의 도서관, 보물들이 숨 쉬고 있어요. 당신이 발견한 보물들이지요.          


당신의 꿈

당신은 꿈 이야기를 했어요. 은퇴하면 35년간 함께 지낸 압축기를 사들여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요. 외삼촌의 집 정원에서 폐지 압축 작업을 계속하며 그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 ‘나만의 책 꾸러미’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지요. 젊은 시절, 품었던 환상과 지식을 모두 담아 꾸러미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부끄럽지 않은 꾸러미를 말이지요. 그 꾸러미에는 당신이 기계가 멈출 때마다 읽었던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가 있어요. 당신은 말했지요.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날 당신은 폐지들을 반 고흐의 <해바라기>로 에워쌌어요. <안녕하세요 고갱 씨!>로 장식하기도 했지요. 아름다운 압축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당신은 당신이 성스럽게 여겨진다고 말했어요. 당신의 야윈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싶군요.     


당신의 온전한 러브스토리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최첨단 압축기와 만나지요. 그 기계로 일하는 이들은 ‘압축’을 해요. 컨베이어 벨트라고 했던가요. 당신을 놀라게 한 그 기계. 작업 속도가 빨랐어요. 노동자들은 메시지를 읽지 않아요. 그들에게 폐지는 압축의 운명을 타고났을 뿐이지요. 당신은 절망해요. 당신의 간절한 꿈, 아름답고 완벽한 철학과 예술의 이상향, 그리스로 노동자들이 휴가를 간다잖아요. 단 한 번의 휴식 없이 일했던 당신, 한타와 다르게요. 당신은 비극일지라도 추락일지라도 원하는 것을 안고 떠나기로 해요. 당신이 사랑했던 압축기 속으로요. 당신의 온전한 러브스토리의 결말이에요.     


아직, 끝나지 않는 당신의 러브스토리

당신이 압축기 앞에 선 마지막 순간, 당신은 집시 여자,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여자, 그녀가 보내준 메시지 하나가 연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봐요. “일론카” 그녀의 이름이에요. 그녀는 당신의 집에 그림자처럼 스며든 여자였어요. 장작을 쌓아두고 당신이 집으로 들어올 때 슬며시 들어오지요. 당신은 해질 무렵을 사랑했어요. “아름다움을 향해가는 문이 열리는” 그 무렵을 기다렸지요. 그녀는 당신의 몸 위에 길게 엎드려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 하나로 당신의 코와 입술 선을 따라 그리며 간간이 입을 맞추었고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어요. 종전이 있기 전 해의 어느 가을날, 당신은 연을 만들었지요. 그녀에게 연을 넘겨주었어요. 휘몰아치는 바람을 받아 흔들리는 연을 보고 떨고 있던 그녀는 어느 저녁 돌아오지 않았어요. “한 개비 장작처럼, 성령의 숨결처럼 단순했던 내 어린 집시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여자, 감자 스튜와 말고기 소시지면 족했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가을 하늘에 커다란 연을 날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던 여자” 그 여자는 아우슈비츠 어느 소각로에 태워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어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았어요.     


한타, 오늘 당신의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당신, 이젠 쉬어요. 당신의 도서관에서.          



<책 소개>

이 소설은 1960년 공산주의 체제하 체코 프라하가 배경이다. 보후밀 흐라발(1914~1990)의 자전적 영감에서 탄생한 소설로 공산체제 감시 아래에서 글을 썼다. 그의 삶 역시 파란만장했다. 프라하 카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공산주의 체제 아래 법조인으로 일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공증인, 서기, 창고업자, 전보 배달부, 전신기사, 제강소 노동자, 철도원, 장난감 가게 점원, 보험사 직원, 약품상 대리인, 단역 연극배우, 폐지 꾸리는 인부 등등의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1963년 『바다의 작은 진주』를 발표, 그의 책들이 금서로 분류되어 말년에 이르기까지 출판이 금지된다. 그래도 흐라발은 끝까지 조국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삶이 녹아있는 실존의 기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많던 딸기는  누가 다  먹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