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곶감

– 서설과 시설이 내려앉는 시간

by 혜윰의 해밀

[심오재일기] 2026.2.14.

설과 곶감

– 서설과 시설이 내려앉는 시간


말 그대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호랑이가 “아이코, 나보다 더 무서운 놈이 있구나” 하고 놀라 도망쳤다는, 호랑이도 멎게 하지 못한 아이의 울음을 단숨에 잠재운 주인공, 곶감 이야기다.


설날이 가까워지자 몇 사람이 선물해 준 곶감을 냉동실에 넣어 둔다. 그 일을 하다 보니 문득, 오래된 설날 풍경이 떠오른다.


요맘때면 엄마는 장을 보고 설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하셨다. 잦은 이사로 살던 집에 따라 금동시장, 학동시장, 남광주시장, 양동시장으로 설 장을 보러 다니셨다. 나는 종종 엄마를 따라나섰고, 흥성거리는 명절 시장은 어린 나를 늘 들뜨게 했다.


눈이 쌓였거나 언 시장길은 사람들의 발길에 녹아 군데군데 질척거렸다. 장을 보러 온 사람도 많았지만 대목을 노리는 상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바빴다. 작은 리어카에 굴비 두름을 싣고 다니며 흥정을 벌이던 연 거리 장사, 전감으로 동태포를 뜨던 생선 장수.


꽁꽁 언 동태를 뭉태기로 쌓아두고 하나씩 떼어내 살과 뼈를 가르는 그 손놀림은 마술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시장 안쪽 떡방앗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하얀 김은 보기만 해도 따뜻했다.


엄마가 비좁은 골목을 오가는 동안 장바구니는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낑낑거리며 그것을 들어드리는 일이 자랑스러웠다. 설빔을 장만하는 일도 빠지지 않았다.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에 새 옷을 마련하는 일은 그 시절의 작은 의식이었다.


떡쌀을 씻어 불리고, 설빔을 챙기고, 장을 보고, 떡을 썰고, 전을 부치고, 고기를 손질하고, 나물을 무치고, 시루떡을 찌고… 설날을 앞둔 엄마의 일은 끝이 없었다.


그 사이 나와 여동생은 다락을 오르내렸다. 엄마 몰래 빼먹는 곶감. 멈출 수 없는 유혹이었다. 매번 빈 꼬지만 남겨놓았지만 엄마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요, 살강 밑에 생쥐 같은 것들…”


웃으며 그렇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그 시절 곶감은 지금 것과 달랐다. 싸리꼬챙이에 열 알씩 꿰어 말린 동글납작한 곶감.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오래 매달려 있어야 했다. 열 알 한 꼬지가 열 개면 백 알 한 접.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엄마는 반 접쯤 사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도 되기 전에 절반을 없애 버리곤 했다.


입가에 하얀 분이 묻으면 서로를 가리키며 급히 닦아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먹으라고 그 자리에 두셨는지도 모른다.


감이 오래 마르면 겉에 눈처럼 고운 시설(柿雪)이 앉는다. 겨울바람을 견딘 끝에 스스로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것이다. 안에서 배어 나온 당분이 겉으로 맺힌, 시간의 흔적이다.

요즘은 그런 곶감을 보기 어렵다. 공장에서 적당히 말려 냉동 보관한 반건시가 대부분이다. 편리하고 부드럽지만 오래 매달린 시간은 없다. 조금만 실온에 두어도 시설 대신 곰팡이가 핀다.


곶감이 달라진 만큼 세상도 달라졌다.

곶감은 빨리 말리고 빨리 팔린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충분히 마르기도 전에 다음 계절로 넘어가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설을 앞두고 남편과 마트에서 장을 본다. 예전 같으면 이것저것 많이를 챙기자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아직도 이것도 저것도 사야 할 것 같아 망설인다. 먹을 사람도 줄었는데 습관만 남았다.


마트의 무인 계산대는 이미 익숙하다. “카드를 넣어 주세요.” 기계는 또박또박 말한다. 어딜 가나 음식 주문은 키오스크가 받고, 화면 속 음성이 나를 안내한다. 계산대 너머로 웃던 얼굴은 사라지고 숫자만 또렷해진다. 사람 대신 불빛이 켜졌다 꺼진다.


기계는 빠르고 정확하다. 하지만 다락에서 곶감을 훔쳐 먹던 그 숨죽임의 달콤함은 모른다.


나는 지금 기계 앞에서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살강 밑의 생쥐처럼 들락거리며 빼먹던 옛날 다락의 곶감을 떠올린다.

두 세계 사이에서 한 손에는 휴대폰을, 한 손에는 곶감의 기억을 쥔 채 잠시 서 있다.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에 안도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다락처럼 스산해진다. 세상은 갈수록 편리해지지만, 사람의 온기는 점점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로 밀려난다.


시설은 기다림 위에 내려앉지만, 화면 속 시간은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설이 가까워지면 나는 지워진 시간을 더듬듯 옛날 곶감을 찾는다.


눈 내린 설날 아침이면 ‘서설(瑞雪)’이 내렸다며 기뻐하시던 아버지, 그리고 '시설(柹雪)'이 두텁게 내려앉았던 다락의 곶감이 함께 떠오른다. 그 하얀 것들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조용히 쌓여 있다.

♤ 이미지

서설과 시설은 기다림 위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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