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찾는 집을 짓다
“심오재(尋吾齋), 나를 찾는 집.
이곳은 마음의 서재이자, 다시 나를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심오재일기 ①] 2025.11.30.
나는 언제나 나만의 방을 갖고 싶었다.
여자들이 보통 드레스룸이나 화장대를 꿈꾼다고 하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마음에 드는 책상과 책장이 놓인, 오롯한 서재를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서재에 나만의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식구 수에 비해 방은 늘 부족했다. 어쩌다 형편이 되어 잠시 서재를 꾸린 적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 방 저 방을 떠돌며, 때로는 ‘존버(존엄하게 버티기)’하듯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런 떠돌이 이력이 쌓인 덕일까. 지금은 어디서든 어느 정도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오히려 요즘은 옷장과 화장대, 침대와 텔레비전이 늘어선 안방이 더 나은 서재가 되기도 한다.
문학과 심리학을 좋아하던 나는, 뒤늦게 본격적인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문단에 이름을 올리고, 상담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시인 상담자’라는 옷을 입었지만, 한밤중 남몰래 고뇌는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지도 어느새 근 삼십 년.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복잡하고 부박하다. 이해조차 어려운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말도 안 되는 책이 일주일 만에 완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먼저 쿡쿡 아팠다. 마치 귀양 온 사람처럼 허허롭고, 때로는 어딘가에 홀린 듯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다산처럼 마음에게 묻는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왔는가?
아니면 바다귀신에게 불려온 것인가?
자네의 집과 고향은 어디이며, 어떻게 해야 그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마음속 서재에 조용히 앉는다.
그곳은 내 마음을 지키는 자리이며, 동시에 내 마음을 찾아가는 자리다. 다산의 말처럼, 어쩌면 나는 “잘못 간직하여 마음을 잃은 자”인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마음의 모양을 모른 채 어떻게 그것을 지킬 수 있겠는가.
성급하다, 그 이름이여.
다산은 “천하의 물건 중 지킬 만한 것은 오직 마음뿐”이라 했고, 성경도 말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하지만 잃어버린 마음을 먼저 찾아야 지킬 수 있다. 불교는 본성을 찾는 과정을 ‘소를 찾는 여정’에 비유해 심우도(尋牛圖)를 그렸고, 심리학은 분석과 상담의 길을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 부른다.
그래서 나는 그 여정을 위해 내 서재에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다산의 사의재(四宜齋), 부연의 수오재(守吾齋), 사임당의 임사재(妊思齋), 초정의 초초시실(艸艸詩室), 해산의 해산토굴(海山土窟), 한송의 한송산방(寒松山房)… 아름다운 당호들은 언제나 마음을 적신다.
물론 나는 그분들처럼 이름을 당당히 걸 만한 문장가도 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편액이 없어도, 이름이 있는 서재는 나의 공부와 글쓰기에 분명한 방향을 줄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의 티끌에 묻히지 않고, 미숙한 자아의 고집에 끌리지 않고, 진정한 나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서재를 ‘심오재(尋吾齋)’, 곧 ‘나를 찾는 집’이라 부르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심오재는 수오재(守吾齋)와 심우장(尋牛莊)이 합쳐진 말이다.
나라는 ‘소(마음)’를 찾고 지키는 집.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내면의 서재.
그것이 바로 심오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시시때때로 ‘심오재일기’를 써 왔다.
심오재일기의 본뜻은, 일상의 가장 작고 사소한 생명에서 조용한 철학이 피어난다는 데 있다.
이 연재에서 나는 기왕에 썼던 글을 정리해 올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글을 써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