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십이란?
띠띠띠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면 나는 쪼르륵 현관 앞으로 간다.
그가 신을 벗고 들어서면 두 팔을 벌리며 말한다.
말없이 안겨 오는 그 짧은 순간,
아이의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밖에서 묻혀 온 긴장과 하루의 무게가 내 어깨 위로 살짝 옮겨지는 것 같다.
나는 그 등을 토닥이며 묻는다.
“오늘 어땠어?”
하지만 이제 아이는 마지못해 몇 마디를 건네고 슬며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흥! 예전엔 껌딱지였으면서...
“엄마, 힘들지? 내가 충전 많이 해줄게!”
먼저 달려와 품에 쏙 안기던 아이였다.
길에 줄지어 가는 개미를 본 이야기를 하고,
바닥분수가 시작됐다며 당장 나가자고 조르고,
친구와 장난치다 혼난 이야기를 내 품속에서 재잘재잘 쏟아내던 아이였다.
생각해 보면 아이와 나 사이의 가장 깊은 대화는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그 순간,
아이의 심장이 내 가슴에 닿아 두근대던 심박,
슬그머니 옷 속으로 파고들던 작은 손길,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던 숨결,
맞닿은 피부의 온기.
그 시간은 아이의 신경계가 안정되던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스킨십은 애정 표현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는 방식이다.
안기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몸으로 배운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세상은 견딜 만하다.
발달은 역설적이다.
충분히 안겨 본 아이만이 스스로 떨어져 나갈 수 있다.
John Bowlby가 말한 ‘안정애착’은 아이를 붙잡아 두는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자기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획득하도록 하는 양육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가 방문을 닫는 모습은 나를 밀어내는 장면이 아니라 자기 삶의 중심을 세우고 있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서운한 마음이 올라오다가도 곧 알게 된다.
‘아, 잘 자라고 있구나.’
영아기의 스킨십은 생존을 위한 공동 조절이었고,
아동기의 스킨십은 감정을 나누는 통로였으며,
지금의 스킨십은 짧지만 깊은 재연결이다.
청소년기의 아이에게 포옹은 “말해 봐”라는 요구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허락이 된다.
그래서 현관에서의 “충전”은 여전히 필요하다.
아이에게는 세상으로 다시 나갈 힘이 되고,
나에게는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오른다.
기대에 못 미치는 외모에 살짝 실망했지만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워 불같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를 속삭이고,
서로의 피부가 닿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던 시간.
그때의 스킨십은 내가 아이를 채우는 일이었고,
지금의 스킨십은 아이의 내면에 이미 채워진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점점 그의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서운해지다가도 이내 마음을 고쳐 잡는다.
양육은 아이를 내 품 안에 머물게 하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에 평생 사용할 수 있는 품을 만들어 주는 일이니까.
언제든 돌아와 잠시 기대고 다시 자기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현관 앞에 선다.
두 팔을 벌리고 말한다.
이 짧은 포옹이 아이의 평생을 지탱하는 정서적 배터리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