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라벨 Sep 10. 2018

소소한 싱가포르 생활기 4

-  불편하게 살기

몇 달 전 세탁기가 고장이 나서 집주인이 세탁기를 바꿔주었다. 전에 쓰던 세탁기는 한국산 세탁기였는데, 새로 들여온 건 유럽 브랜드 제품이다. 새 세탁기는 모터 기능이 약한 지 드럼통 돌아가는 속도가 최고로 높여도 한국산 세탁기만 못했다. 빨래가 끝난 세탁물들의 물기가 꽉 짜진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도 뜨거운 햇빛에 말리면 되니 그럭저럭 쓰겠다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제 거품이다. 빨래 헹굼 과정에서 탈수가 잘 되어야 거품도 잘 빠져나가는데 탈수가 약하니 빨래가 끝나도록 거품이 잘 빠져나가지 않았다. 세탁기 돌아가는 동안 세탁기를 지켜보며 거품이 빠지는지를 살피고, 안 빠지면 따로 헹굼을 여러 차례 더 하고.... 그래도 거품은 계속해서 나왔다. 세탁기 앞에서 3시간 빨래를 돌리면서 지켜본 결과 세제 거품은 없어지지 않았다. 평상시 거품 많은 걸 피하려고 low sud라고 거품 적게 나오는 세제를 사용했는데 그것도 아무 의미 없었다.


 3시간가량을 세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왜 세탁기 탈수 기능이 약할까, 유럽은 건조해서 굳이 빨래를 꽉 짤 필요가 없나? 헹굼 할 때마다 왜 빨래를 꽉 짜지 않지? 아님 그냥 모터 기능이 약한 싼 세탁기를 주인이 사준 걸까?  그 제품의 기술 수준이 그 정도인 건가? 그렇다고 해도 세제 거품이 아무리 헹궈도 빠지지 않는 세탁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새 세탁기인데 주인한테 컴플레인 하기도 번거롭고 아예 세제 없이 빨래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화학제품 없이 살기를 실천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데 대추나무인가 그걸로 만든 볼 몇 개를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하는 걸 본터라 그 정도는 아니어도 뭔가 방법이 있는지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역시 찾아보면 언제나 길은 있다.


세탁볼이란 걸 찾았다. 물을 알칼리로 바꿔줘서 빨래 때를 빼주는 거였다. 세탁볼이 물에 잠겨있는 시간이 오랠수록 물이 알칼리화 되면서 세탁 기능이 좋아진단다. 세탁볼을 구입해서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세탁볼이 물에 잠겨 있게 해두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세탁기에 물이 유입되면 볼이 물에 잠겼는지를 확인하고 세탁기 중지 버튼은 누르고 30분에서 한 시간 뒤에 다시 세탁기를 돌렸다. 중지했다 다시 돌리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빨래를 마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빨래를 하는 날이면 오전 시간은 일찍 외출할 수가 없다. 그래도 빨래는 만족스럽게 됐고, 세탁볼에서 나오는 향기가 있어서 냄새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빨랫감이라 봤자 땀 흘려 벗어놓은 옷들에 수건들이 주로 이니 빨래 성능이 좋고 나쁘고 빨래 결과는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세탁세제를 안 쓰니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느낌이 들어서 뿌듯했다. 왜 지금까지 이런 방법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한동안은 세제로 빨았을 때 옷에 남아 있던 세제 찌꺼기가 빨래할 때 나왔다. 세제 묻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세제 향이 나면 프레시 하게 느꼈던 게 바보 같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법을 몰라서, 방법을 찾기 게을러서 익숙한 대로 빨래를 했던 거지 궁하면 통한다고 조금만 생각하면 언제나 더 나은 길은 있었다. 세탁볼 빨래가 좀 불편하지만 환경보호와 건강을 지키는 '가치가 있는 불편함'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연에 가까이 살수록 편리하고 실용적인 것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올바른 것, 가치 있는 걸 쫒아야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싱가포르에 와서 느끼게 된 가치 있는 불편함은 또 한 가지 있다. 싱가포르에 와서 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운전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한국에서 고질병이었던 편두통이 없어졌다. 서울에서 스트레스와 편두통을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약으로 버텼으나 운전을 안 하고 걸으니 한 달에 한 번씩 겪었던 편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한국 생활이 여기보다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이어서 편두통이  다른 이유로 유발됐을 수도 있으나, 장거리 운전을 했을 때 어김없이 편두통을 겪었으니, 운전은 나에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땐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에서 집을 오가는 길에 땀을 흠뻑 흘려서 고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땀을 흘리고 걷는 건 건강에 도움이 되었고, 걷는 길은 나에게 남다른 정취를 느끼게 해줬다. 걸어가는 길 양쪽으로 숲이 있어서 포장된 길 위로 가끔 실뱀이 지나가거나 비 온 뒤에 개구리, 달팽이들이 길가에 나와 있곤 한다. 해가 진 뒤 걷는 길에는 풀 숲에서 나는 풀냄새가 가득해서 시골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도  한다.  

어떤 건축가가 말하길 집에 도달하는 길이 구불구불하게 일종의 여정이 있을 경우 도달했을 때 만족감과 안도감이 커진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땀을 흘리면서 집에 들어오지만 집에 왔을 때의 안락감과 만족감은 크다. (다만 안 좋은 건 집을 나가기 싫어진다는 점이다)


차가 없어서 불편한 건 마트에서 장을 볼 때다. 무거운 걸 들고 오래 걷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먹는 식재료는 조금씩 자주 구입하고, 무거운 건 인터넷에 주문해서 배달을 받는다. 한 2년쯤 되니 차 없이 장보기도 힘들고 불편하다기보다는 익숙해져서 내 일상이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세제를 안 써도 되는 세탁기를 개발했다는 기사를 봤다. 한국에 돌아가면 세제 없는 세탁기 사용도 함 생각해 봐야지 싶다. 아직 판매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암튼 세탁볼 빨래가 지금은 만족스럽고 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쭉 하게 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소소한 싱가포르 생활기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