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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벨 Sep 06. 2018

소소한 싱가포르 생활기 3

-  일 년 내내 여름옷만 입을까?

싱가포르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고 밖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 훅 하고 불어오는 습하고 더운 바람은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 느끼는 싱가포르에 대한 첫인상이다. 싱가포르는 적도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국가이며 열대기후 지역이고, 자주 비가 내리고, 일 년 내내 여름이 지속되는 덥고 습한 나라이다. 어디선가 싱가포르 날씨는 더운 날과 더 더운 날로 나뉜다고 말하는 걸 봤는데, 싱가포르에 살다 보면 미묘하게 계절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다. 2년 정도 살면서 느낀 건 더운 날, 더 더운 날 그리고 선선한 날도 가끔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저녁시간 때 한국에서 느낄 수 있는 선선한 여름날 저녁 같은 날씨는 무척 반갑다.  


싱가포르로 들어오는 태양빛은 치명적으로 강렬하다. 맨살로 햇빛을 받으면 살이 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양산 겸용 우산을 꼭 가지고 다닌다. 예측할 수 없는 국지성 폭우가 자주 쏟아지기 때문에 우산도 필수다. 아침에 화창하더라도 오후에 폭우가 쏟아질 수 있으며, 우리 집에 비가 쏟아질 때도 옆동네 하늘은 아무렇지 않게 맑은 게 싱가포르의 날씨이다. 


한국에서는 집을 구할 때 여름에  햇빛이 덜 들어오고 겨울에 햇빛이 깊게 들어오는 남향을 선호한다. 그러나 여기는 적도 부근이라 남향과 북향을 구분하지 않고, 서향만 피하면 된다고 한다. 우리 집은 남향집인데 햇빛이 거실로 들어오는 깊이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때가 있다. 싱가포르가 북위 1'22''라고 적도 살짝 위에 있어서 생기는 일인가 보다. 해가 좀 더 깊이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있다가 뜨거운 햇빛에 낭패를 본 일들이 있다. 발코니 근처 거실 책장에 꽂여 있는 책 표지등이 바래져서 제목이 흐릿해져 버린 것이다. 뒤늦게 알고 책장을 안쪽으로 옮겼으니 망정이지 책들이 다 하얗게 돼버릴 뻔했다. 책장 근처에 있던 얇은 부직포 가방은 한 5-6개월 만에 삭아서 건드리니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아끼던 뱅 앤 울슨 헤드폰이 처음 구입했을 때 그 상자 그대로 넣어 놨는데 귀에 닿는 스펀지 부분이 녹아 뜯겨 나왔다. 싱가포르의 햇빛은 내 얼굴을 태우고 기미 주근깨를 만들어 놨는데, 생활 곳곳에도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매일 적게라도 들어오는 햇빛도 조심해야 한다.


아무튼 나는 여기 도착했을 때 습하고 뜨거운 날씨를 견디려면 시원한 옷과 신발이 여러 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한국에서 입던 여름옷 몇 벌과 한두 개의 샌들로는 일 년 내내 더운 날씨를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래서 쇼핑센터를 돌면서 옷과 샌들을 이것저것 눈여겨보고, 버스나 MRT(싱가포르의 지하철)를  타면 사람들이 어떤 신발, 어떤 복장인지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반팔 옷과 반바지, 샌들을 하나둘 장만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신고 다니는 신발은 여름용 샌들이 아니라 스케쳐스 워킹화이다. 처음에 왔을 때 더운 날씨에 샌들만 신어야 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샌들은 집 근처 잠깐 나갈 때 외에는 거의 신지 않는다. 일 년 내내 앞이 막히고 발등이 덮이는 워킹화만 신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발이 덥지 않고, 많이 걸으니 발 편한 게 우선이 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샌들보다 막힌 정장용 신발이나 운동화 신은 여자들이나 심지어 워커 같은 것도 신은 사람도 많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요즘은 얇은 긴소매 옷도 산다. 싱가포르에서 볼 일은 대부분 에어컨 바람이 잘 나오는 쇼핑몰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가방에 늘 긴소매 카디건이나 스카프를 넣고 다닌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나 학생들은 에어컨 있는 곳에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예 좀 두꺼워보이는 긴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싱가포르는 계절은 하나지만 민소매, 핫팬츠에서 긴소매 두꺼운 카디건까지 봄에서 가을까지의 옷차림을 다 볼 수 있다.


해외에 살면 좋은 점 한 가지는 옷차림에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한국사람들 만큼 유행에 민감한 집단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등산을 가거나 관광을 가거나 하면 정해진 옷차림이 있다. 그해 유행하는 바람막이 잠바가 산을 수놓고, 낮은 산을 오를 때도 등산화를 갖춰 신어야 주변의 타박을 받지 않는다. 해외여행지에 가서 옷차림을 보면 한국인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옷도 문화의 일부이니 해외에서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하나, 무리의 비슷한 옷차림을 보면 나도 저렇게 옷을 입어야 하나 하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유행을 따르는걸 일부러 피했다. 유행에 민감하고 한번 따르다 보면 계속 쫓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일부러 거부하는.... 그런 거 말이다. 그렇다고 신경을 안 쓴 건 아니다. 내 옷차림이 너무 올드한 건 아닌지 자주 만나는 동네 이웃에게 너무 같은 옷만 보여준 건 아닌지, 산책을 가거나 운동을 나갈 때 제대로 된 운동복을 입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해외에 있으면 나는 주류가 아니고 외국인이니 옷차림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사회적 경제적인 위치가 드러나는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갈 외국인일 뿐이다.

 

싱가포르에서  더욱 옷차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게, 싱가포르는 인종과 문화가 다양해서 옷차림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피부색에 어울리는 컬러 색깔과 톤도 다르고 아무리 덥다 해도 문화에 따라 노출 정도도 다르다. 히잡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최신 헤드폰을 쓰고 조깅하는 사람부터, 긴 옷의 전통의상으로 온몸을 감싸고 산책하는 여인들, 란제리 같은 끈나시에 쇼트 팬츠를 입은 여인들까지..... 그래서 유행하는 패션이 뭔지 한눈에 잡히지도 않는다. 한국에 어느 겨울 롱 패딩이 겨울을 장악했던 것처럼 특정 패션이 그 사회를 휩쓸고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의 문화와 취향, 각자의 온도대로 옷을 입는다. 싱가포르 사회는 다양성과 그것의 공존이 핵심가치 중 하나이고, 그걸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나는 그 옷차림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건저 낸다. 그게 좋다.  


그리고 참, 싱가포르에서 겨울 옷도 때때로 필요하다. 지인 가족은 싱가포르에 살러오면서 겨울 옷들을 다 처분하고 왔다고 후회를 했다. 싱가포르가 워낙 작은 나라여서 휴가철이면 시원한 데를 찾아 다른 나라로 여행 가는 경우도 많고, 한국의 겨울에 가려면 필요하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도 겨울 옷을 장만할 수 있다. 겨울옷만 파는 매장도 있고, 계절이 바뀌면 겨울 옷을 내놓는 매장도 있다. 딸과 자주 구경 가는 한 여성복 매장은 옷값도 저렴하고 디자인도 좋은데 주로 가을 겨울 옷들이 주다. 나도 마음에 드는 겨울 옷이 있지만 당분간 한국 갈 일도 없으니 한번 입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구매욕을 꾹꾹 누르고 있다. 때때로 패션에 관심이 많은 싱가포르 사람들도 겨울 옷을 입고 싶어서 추운 데로 여향을 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양한 패션을 소화하고 싶은 욕구가 왜 없을까 싶다. 필요하지 않는데 사고 싶은 욕구는 계절과 맞지 않은 옷에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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