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학교에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받았던 날, 가만히 있으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나고 힘든지 동료 선생님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학생의 사생활을 지켜줘야 하는 까닭에 꾹 담아 놓아야 했다. 집에서 남편을 붙들고 이야기해 보았으나 자세한 속사정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고 애먼 위로만 건넬 뿐이었다. (사람은 착합니다.)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상대는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친한 선생님들인데 지금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탓에 만나서 얘기하기가 어려웠다. 단체카톡방으로는 도저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친정 엄마에게 엄청 섭섭했던 날이 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일기장을 뒤져 보면 알 테지만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을 만큼 무척 기분이 상했었다. 엄마가 속상하실까, 내가 나쁜 딸이 될까 싶어 엄마에게는 서운한 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동생에게 말하면 엄마한테 이야기가 들어갈 것이 뻔하니. 그리고 자매들끼리 엄마 뒷담화를 하는 건 나쁜 거니까 말할 수 없었다. 남편, 친구들 모두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행복한 일,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누군가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어려웠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 과정을 이야기하고 비결을 나누고 싶었으나, 잘난척쟁이가 되는 것 같아서 꺼려졌다.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좋은 생각에 대해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때에도 나와 똑 닮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그 사람 이야기도 들어주다 보니 내 얘기가 자꾸 흐릿해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맨날 생각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하고 그것이 나올 수가 없으니 늘 머릿속이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말하기가 어려우니 쓰자. 내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 보자. 그래서 나는 나의 대나무 숲, 일기장으로 들어갔다. 엄청 두꺼운 일기장을 샀다. 일기장에 휘갈겨 쓰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그런데 일기장은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때, 마음이 우울할 때만 펴게 되었다. 이상하게 행복한 마음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힘든 일을 쓰다 보니 마음은 풀릴지 몰라도 그 마음과 관련된 생각이 정리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니 부끄럽기만 할 뿐이었다.
다음 단계로 '읽는 사람'이 되어 블로그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 고민하고 있던 것에 대한 책을 읽고, 관련된 내 생각을 짤막하게 남겼다. 하지만 책에 대해 쓰다 보니 자꾸 혼자서 '서평단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저자들은 나보다 더 잘 정돈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얘기해 주고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수밖에. 재미가 없으니 서평을 쓰기 싫어서 책을 읽지 않기도 하였다.(엥?)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읽는 사람으로 남는 것인가 체념하고 어느 때부터인가 책을 읽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
경주로 가족 여행을 간 10월의 어느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숙소 앞에 있던 금관총을 혼자 산책하고 있었다. '아 정말 좋다. 뭐가 좋지? 내가 참 행복하네. 이 순간을 남겨두고 싶다.' 카톡으로 사진은 보낼 수 있었지만, 그날의 하늘, 초록의 무덤들, 맛없는 커피, 공기, 습도, 무덤 앞에서 체조하는 어르신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나눌 길이 없었다. 이제 진짜 쓰고 싶다고 느낀 순간 바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휴대폰의 네이버 화면 속 '슬초 브런치 작가 프로젝트'였다. '브런치'는 잘 몰랐으나 '작가 프로젝트'라는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 작가가 되는 거야!' 홀린 듯이 프로젝트에 참여 신청을 했다. 물론 취소 가능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캘린더에 잊지 않고 표시도 해 두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환불하지 않았다. 나 자신 칭찬도장 쾅쾅.
그렇게 몇 년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어느날 갑자기. 글을 쓰니 가장 좋은 점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나의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글로 뱉어 내고 나면 명료해져서 더 이상 그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굴러다니지 않는다.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을 제 자리에 놓아주듯이, 생각을 글에 넣어 완성했더니 머릿속이 보기 좋게 정리되고, 필요할 때 그 생각들을 잘 꺼내쓸 수 있다. 정리되어 새롭게 찾은 공간에 새로운 물건을 넣을 수 있듯 새로운 생각도 차곡차곡 잘 들어오는 것 같다. 글쓰기는 '생각 정리 전문가'이다.
한 가지 더, 이제는 그냥 정리하지 말고 '잘' 정리하고 싶다. 내 머릿속 주머니에 데굴 데굴 굴러 다니는 생각 구슬들 중 반짝거리는 것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이제 글이라는 실에 꿰어 엮자. 기왕이면 예쁘게 엮어서 목에도 걸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하듯이, 이제는 나를 위한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궁금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서 잘 써보고 싶다.
지금 나의 생각 주머니에 구슬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들도 다 가진 구슬도 있고, 나만이 가진 특별한 구슬도 몇 개쯤은 있을지도 몰라. 어떤 것은 반짝거리고 어떤 것은 깨지고 못난 모양도 있겠지. 하지만 못난 모양도 거기에 꼭 맞는 실을 맞춰주면 된다. 정갈함 속에서만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하고 보니 모든 것들이 구슬로 보인다. 생각 주머니가 비워지는 속도보다 채워지는 속도가 더 빨라지면 좋겠다.'쓰는 사람'이 되니 정말 삶이 바뀌었다.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쓰는 사람이 1등이 되는 겁니다. 포기하지 말고 쓰세요. 시간을 버텨내세요, 글쓰기를 뒤로 미뤄두지 마세요. 그냥 쓰세요. 2년 동안 300편 썼어요. 6분 전까지도 썼어요.
2024년 11월 16일,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그 자리에 있던200여 명의 작가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