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건 너만 알기, 명랑한 세 가지 레슨

오늘은 수요일?

by 밈혜윤

첫 번째 레슨: 스스로를 좋아하기. 그럴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럴 수 있는 곳에 있기.

일하는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회사를 퇴사했다. 즐거움과 고통은 본디 양면의 동전 같은 것이지만 그 회사는 양쪽 다 상당히 과했다. 더해서 업무량도. 그곳을 다니면서 나는 나를 잃어가는 듯한 고통을 자주 느꼈다.


그곳에서 나는 갈수록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농담을 하지 않았다. 친구, 웃음, 집안일, 하나씩 차례로 포기했다. 점차 나를 꾸미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 한때 무신사와 올리브영 골드 회원이던 내가 말이다! 그저 무감각하게 누워 있으면서 회사에서 ‘이게 맞나?’하고 갸웃거리게 만드는 일--주로 타인의 고통과 연관이 깊은 것--들에도 무감각해지려고 노력했다. 성공할수록 패배감이 짙어지던 회색 감각. 탁한 나의 일상.


세간에 떠도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주로 연애 카테고리에서 쓰이는 충고인데, ‘스스로가 좋아지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 말은 단지 연애에 국한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회사에도 분명히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살기 때문에. 가족보다 더 오래 보는 게 직장 동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굉장히 바람직하지 않은 회사 생활을 한 셈이다.


두 번째 레슨: 세상에 나의 자리는 있다

세간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짚신도 짝이 있다. 만날 사람은 전쟁이 나도 만나고 될 일은 어떻게든 그렇게 된다.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을 사용하기엔 꺼려지지만 그럼에도 운명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있다. 심지어 수억의 돈이 오가고 치환하자면 수십 억에 해당할 스트레스가 걸리는 집 문제도 그렇지 않던가. 될 일은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잘 길들인 자전거처럼 스윽 스윽 나간다.


이직한 회사는 바로 그런 만남이었다. 암만 무감각하려고 노력해도 스트레스는 나를 조금씩 무너뜨렸다. 길고 긴 설 연휴 내내 아프던 나는 침대에서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란 걸 했다. 아, 지겨워,라고. 스트레스가 가득한 환경에서 나를 다독이다가 휴일에 침대로 무너져내리는 일상이 지겹고 타인의 고통에 흐린 눈 하는 게 지겨웠다. 천장과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것을 볼 힘이 없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른 내가, 월급을 무용한 ‘시* 비용’으로 탕진하는 내가. 정말 지겨워.


그래서 나는 기도가 찢어질 것 같이 기침을 하면서도 컴퓨터를 켰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순식간에 십여 개의 회사에 지원했다. 연휴가 채 끝나지 않은 시점에 전화를 해서 너와 꼭 일을 하고 싶다고 외치는 수상쩍은 사람이 있는 회사와 면접 약속을 잡았다. 내가 이런 곳에 들어갈 수 있겠어, 싶던 회사였다.


그냥 그랬던 다른 회사들은 나를 떨어뜨리거나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꼭 가고 싶던 그곳은 나를 불렀다. 다녀보니 급여도 워라밸도 훨씬 좋다. 전 회사보다 사옥이나 컴퓨터, 집기는 훨씬 구리지만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이곳이 나의 자리였구나. 정말로 이 세상은 내 자리를 남겨놓는가 봐.


세 번째 레슨: 당신은 패배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손가락질하게 만드는 회사를 다니면서 매일 떠올렸던 단어, 패배자. 매일 우울해하고 쌍욕을 되뇌며 나를 좀먹으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경기가 어렵다는데. 쉬었음 청년이 역대급이라는데. 이런 노답 회사니까 내가 다니는 거지. 여기 아니면 내가 어딘가 갈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으로 무기력하게 출근을 멈추지 않았고 또한 나를 혐오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황이 왔다. 자다가 숨이 차서 깨기 시작한 며칠의 밤은 대수롭지 않았다. 정말 죽을 것 같던 어느 밤은?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연차를 쓰며 나가지 못한 날들은? 무섭고 불안하고 한심했다. 무표정으로 출근을 하던 때보다도 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내 삶이 내가 보는 유튜브라면 마구 넘겨버리고 싶은 지경으로 끔찍했다. 패배자. 낙원을 바랄 자격 없는 도망자.


하지만 시간은 꾸역꾸역 흘렀다. 도망치는 것 또한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고, 그 시기에 나는 별수 없이 도망을 쳐야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도망의 시간은 종국에는 내 심신의 건강을 정상 궤도로 올려주었다. 난 다시 명랑해졌고 기운 넘치게 많은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코가 꽉 막혀 꽃 향기를 맡지는 못하지만 시간을 들여 꽃과 거위를 구경한다.


패배자? 꽃 향기를 맡는 패배자도 있더냐. 도심의 거위 일가족을 신기해할 겨를도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승자가 맞단 말이냐.


우리는 왜 버티는 것을 미덕이라 믿을까

스스로가 싫어지는 환경에서 버티는 것은 훈장이 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 재갈이 될 뿐이다. 인생을 60년쯤 살고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이렇게 말하면 반박하지 못하겠지), 결국 인생에는 나 하나만이 중요하다고 했다. 내가 건강하고 살고 싶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구기지 않는다고 말이다. 돈과 명예는 아무래도 있으면 좋지만 그건 생각보다 아주 작은 거라고.


최근에 정주행 했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염혜란 배우는 킥킥 웃으며 ‘나는요, 맞고 살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고 말했다. 왜 처음 볼 땐 그 대사가 그토록 흐릿했지. 아마 그땐 내가 인생에 처맞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게 틀림이 없다. 인생은 언제나 나를 흠씬 두들겨 팰 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한번 패기 시작하면 ‘얘가 정말, 정도를 모른다’ 싶게 매타작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모두 ‘맞고 살아도 명랑한 연놈’이 되어야겠다.


버티는 마음은 언젠가 꺾인다. 아무리 독하게 마음먹어도 꺾인 뒤에는 손쓸 수가 없다. 그러나 그저 명랑할 뿐이라면? 정도를 모르는 인생의 채찍질도 우리의 무릎을 꿇릴 수는 없는 법. 그러니 그저 명랑하게 사시게. 꽃을 구경하고 햇빛을 쬐며, 도심에 나타나는 거위 너구리 수달 따위의 궁둥이를 구경하며.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