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박 2,000원의 경영학

워킹맘의 장바구니에서 시작되는 가정 재무 철학

by miracle monica



연휴의 끝,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봤다. 한 마을의 촌장이 겨울을 나기 위해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해진 배우의 묵직한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장면이 남긴 문장은 의외로 단순했다. 인간은 원래 채집하고 사냥하는 종족이라는 것. 먹고살기 위해 움직이고, 찾고, 쟁이는 존재라는 사실. 설날을 지내며 이상하게도 그 명제가 또렷해졌다.



워킹맘에게 사냥 본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의외로 장보기다. 식료품 쇼핑은 감성의 영역 같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판단과 선택이 필요한 이성적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장바구니는 전략이고, 할인 스티커는 정보이며, 결제 금액은 그날의 성과지표다. 특히 명절처럼 확장된 범위의 식구들을 챙겨야 하는 시기에는 더 그렇다. “넉넉하게 사되, 과하지 않게 딱 적당히 쓴다.” 이 미션은 생각보다 난도가 높다.



설 연휴,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친정 식구들 가족이 함께 근교 여행을 다녀왔다. 덜 분주하고, 안 막힐 곳을 찾다 경기도 모처로 결정했다. 1박이지만 목표는 명확했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편히 모여 배 따뜻하게 풍요롭게 먹는 것. 에어비앤비로 구한 3층 독채 숙소 근처 새로 생긴 하나로마트에 들렀다. 매일 앱으로만 후다닥 주문하곤 했기에, 일상의 균열을 깨는 오랜만의 오프라인 장보기였다.



마트에 들어서는 순간, 감각이 달라진다. 채소/육류 코너의 색감, 진열 밀도, 가격표의 숫자를 빠르게 스캔한다. 신선식품은 확연하게 도시 대형마트보다 가격 경쟁력이 있었고, 빛깔도 상태도 좋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아름 카트에 넘치게 담았는데도 예상보다 총액이 낮게 나왔다. 적은 금액으로 넉넉히 확보했다는 사실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살림과 경영에서 ‘충분함’은 곧 마음의 여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그날 하루치 함께 먹기 위해 장을 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온전했고, 꽤 따스했다.



그날 소소하지만 가장 반가웠던 건 애호박이었다. 우리 집에서 4계절 내내 떨어지지 않는 재료. 가격은 단 2,000원. 애호박은 화려하진 않지만 활용도가 높다. 전으로 부쳐 단백질 반찬과 함께 균형을 맞추고, 국수나 파스타에 넣어 곁들여 먹기도 좋다. 또 된장국에 넣거나 스테이크 가니쉬로 구어 달달한 감칠맛을 보완한다. 우리집에선 초록색 담당의 피자 토핑으로도 쓰이고, 애호박 볶음으로도 훌륭하다. 가격 대비 쓰임새가 넓고, 식감도 부드러운 안정적 선택지다.



언제나 문제는 물가다. 커 갈수록 아이들의 교육비는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식료품 물가는 체감상 더 가파르다. 금딸기, 금겹살, 금계란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돌기도 한다. 그래서 늘 중요한 건 ‘얼마를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밀도 있게 쓰는 능력. 같은 5만 원이라도 체감 가치를 다르게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래서 나는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사냥한다. 집 앞 할인마트에서 부터 이마트, 트레이더스, 홈플러스, 쿠팡, 마켓컬리, 오아시스마켓, 한살림, 최근에는 코스트코까지 다니기 시작했다. 평균 2,000원 선이면 관망, 1,000원대가 보이면 즉시 네댓개 확보. 가격의 흐름을 보며 타이밍을 잡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짜릿하다. 이것이 나의 소소한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명징한 순간이다.



가정 경영은 거창하지 않다. 결국은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의 컨디션과 만족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나는 회사에서의 내 일을 책임지면서, 동시에 가정을 운영한다. 두 조직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자원을 읽고, 우선 순위를 정하고, 감정보다 데이터를 앞세우는 것. 물론 사랑은 기본값이다. 다만 그 사랑이 오래가려면 효율적인 전략과 구조가 필요하다.



애호박 지표는 단순한 가격표가 아니다. 그 날의 효율적인 지출과 투자 선택이 우리 집의 여유를 몇 퍼센트쯤 높였다는 초록불 신호다. 워킹맘의 사냥은 요란하지 않다. 다만 꾸준하다. 오늘도 나는 차분하게 장바구니를 점검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잘 산 한 개의 애호박이 결국 우리 집, 우리 가정의 하루를 조금 더 단단하고 따스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다면: 흑백요리사2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