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책 중 한 권은 <90년생이 온다>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90년생의 트랜드는 물론 '꼰대가 되지 않는 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고 무엇보다 80년대 생과 90년대 생의 차이점과 그 이유 또한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나는 80년대 생 중에서도 그래도 끝자락에 속하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에는 '교사'라는 직업이 여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워너비 직업이었다. 최상위권 친구들은 의사, 법조인, 외교관을 꿈꾸며 기숙사에서 날밤을 지새며 공부를 했었고 상위권 친구들은 대부분 교대나 사범대를 진학하는게 가장 큰 목표였다. 나 역시도 그랬다. 나는 성적이 간신히 중상위권을 왔다갔다 하는 편이었음에도.
수능성적 결과는 참담했고, 가정 형편 상 재수를 하지 못해서 찾아보게 된 직업이 지금 10년째 하고 있는 '언어치료사'였다. 19년 인생 동안 들어보지도 못한 직업을 갖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니. 그것보다 지방대라는 것이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2호선도 타보고 싶었고, 나의 대학생활은 아무리 못해도 그래도 서울에서 시작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당시에도 깨어있으신 선생님들께서는 나의 선택을 응원해주셨다. '전문직'이 그래도 좋은 거라고. 그래도 나중에 학과에 교직이수 기회가 있다면 꼭 해보라고.(나는 교직이수는 신청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도전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긴 했는데.)
'교사'를 꿈꾸었던 이유는 거의 13년이 지나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이지만 '남 보기에도 좋고 안정적이어서'가 진짜 이유였던 것 같다. 어린 나이긴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큰 포부는 없었다. 교사가 되면 나도 예쁜 옷을 입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같이 지내고 결혼도 잘 하고 가정도 행복하게 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무원이셨던...(아, 이 문장은 이력서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최악의 문장 시작이라고 들었는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대학을 가지 않고 차라리 아직 국사(당시는 한국사가 아니었다)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공무원 준비 학원을 다니라는 권유를 매일 받았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 바지만 80년대 생들은 '컴퓨터',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크게 보급되는 시점에 초등학생 또는 중학생이었고 그 와중에 IMF를 겪은 분들이 많았을 것 같다. 가족 또는 친척 누군가의 실직, 이를 보거나 겪어가며 청소년이 되어보니 그래도 안정성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나의 대학, 대학원 시절을 돌이켜보아도 '안정성'에 대한 욕심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원을 가서 대학병원에 들어가면. 내가 지방대 출신인 것도,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도 더 커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혼 이후, 다행히 신랑의 적극적인 지지로 논문을 쓰고 새로운 지역에서 이직을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면접 때의 난감한 질문은 그동안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보고자 언어발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원장 또한 아이는 언제 낳을 계획인지, 적어도 1년은 함께 일하고 갖는 게 좋지 않겠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그래도 전문직이니까 이러한 질문은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안정적인 기관 울타리를 벗어나서 마치 사회로부터 공격을 계속 받는 느낌이었다. 기관 울타리가 없기에 당연히 임신을 해도 육아휴직도 없고 나를 보호해줄 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온이를 출산하고 한 6개월 정도는 매일 퇴사한 순간을 후회했던 것 같다. 계속 있었더라면 육아휴직도 받고 급여도 나왔겠지, 이러한 불안감에 시달리지는 않았겠지. 아이가 잘 때만 주어지는 내 시간에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어가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일을 하고 싶어도 휴대용 유축기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까지 일을 하는 모진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책 읽기와 글쓰기'였다. 당시는 글을 거창하게 써본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가장 익숙한 공간인 블로그에 언어치료와 관련된 교재, 교구, 그리고 그동안의 임상현장에서 만난 케이스를 정리하는 느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 그 글을 찾아 읽어보면 지금도 부족한 글이 많지만 당시에 쓴 글은 허술함이 더 많이 느껴진다. 글을 쓰면서 점점 내 공간에서 만큼은 내가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엄마가 되고 난 후에 글을 써보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 글을 초반에 한 1년 정도는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좋은 분들과 소통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점점 내 글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잘' 쓰고 싶었다. 콘텐츠를 예쁘고 한눈에 들어오게 꾸미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글에서라도 내공이 드러나고 전달력이 있어야 하는데.
글을 잘 쓰는 방법은 잘 쓰인 글을 읽는 거였다. 그렇다고 '글쓰기' 주제에 대한 책에만 몰입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기록, 마케팅, 글쓰기, 시대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책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책을 읽는 게 독자들의 니즈를 파악하는데 훨씬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적지만, 아시다시피 아직 내 글쓰기 실력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언어치료사'는 프리랜서가 가능한 직업이다. 그래서 뒤늦게 이 공부를 시작하시는 분들 중 아이 엄마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일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직업이라는 것은 출산 이후 복귀하자마자 계속 느꼈던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더 이상 '안정성'과 '전문직'이 내 직업을 보호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서점에서는 AI를 다루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폐 범주성 장애 아동의 치료, 상담 또한 인공지능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대두되기 시작했다. 내가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대부분의 반응은 '아직은'이라는 반응이 더 많았지만. "에이, 그렇긴 하겠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코로나 19가 터졌다. 신종플루와 메르스도 겪어 보았지만 이렇게 일상을 바꾼 전염병은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2월에 근무하는 기관이 휴관을 했을 때는 메르스 때처럼 길어야 2주라는 생각으로, 아이가 등원하고 난 이후에 미루었던 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3월 한 달은 보이지 않는 총을 겨루는 전쟁이 난 것 같았다. 출근을 하지 않는 것도 불안정한데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까지 막혀서 좀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작년 12월에 정규직 면접을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에겐 프리랜서가 아이를 키우고 일도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새로 근무하기로 했던 소아정신과는 이제 막 오픈을 시작한 단계여서 아주 간간히 평가만 잡히고 수업은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해도 글을 쓸 재료가 없었다. 수업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작되는 독박 육아. 아무리 산책을 해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하루. 그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한 달이 지나갔다.
다시 일이 시작되었지만 마음속에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규직 채용시장도 이 분야 또한 얼어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정규직을 간다고 하더라도 당장 아이의 등 하원 문제에 또 부딪히게 되었을 거고 친정 엄마와 그 문제로 인하여 작년처럼 기나긴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을 견딜 자신 또한 없었다. 간간히 정규직 공고가 나서 남몰래 이력서를 썼지만 이전처럼 그 기관에 헌신하겠노라는 포부와 사탕발린 말이 써지지도 않았다. '정규직에 간다고 행복할까?' '급여는 안정적이겠지만 정말 행복할까?'
그리고 다시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또다시 기관이 휴관에 들어갔다. 3월과는 받아들이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아이의 등원은 가능하다는 점이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병원도 다행히 신규 아동들이 있었고 간간히 들어오는 평가 의뢰, 가정방문 언어치료 덕분에 수입에 대한 부담 또한 3월보다는 적었던 것 같다. 수입은 그 달 생활비의 일부를 벌 수 있다지만 진짜 문제는 앞으로 내 일의 방향성이었다. 그래도 안정적인, 안정성이 없다 해도 수요가 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었는데. 전염병 앞에서 1대 1 대면 치료를 하는 이 직종은 많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또 준비해야 하는 때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의 20대는 '언어치료' 공부가 거의 99%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떠한 일을 해야 할까? 상담 대학원을 다시 들어가자니 돈과 시간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1인 치료실을 차려서 사업을 벌이기엔 때가 너무 불안정했다. 휴관 기간 동안, 병원 출근이 없는 날이면 거의 독립서점을 갔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책들이 돌이켜보면 마른땅에 생수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기록의 쓸모', '프릳츠에서 일합니다', '기획자의 습관'. 그동안 내가 읽어왔던 육아서와 심리학, 신앙서적과는 색이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내가 가진 직업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어떻게 나를 브랜딩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보물 찾기를 하듯이 찾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Personal branding'이라는 해답은 어느 정도 나왔는데 그 안에서 어떻게 세부적인 방법들을 찾아갈 수 있을까.
아직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이지만 personal branding을 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또한 '읽고 쓰는 것'이었다. '잘 읽고 잘 쓰는 것'. 일과 육아를 하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때에 독서만큼 세상의 흐름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수단이 또 존재할까. 그리고 나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 보면 앞으로의 방향성이 잡히기도 하고 무엇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소통의 벽이 더 얇아진다. 요즘은 작가분들도 독자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앞으로의 글을 방향성을 잡거나 독자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처럼 '베일에 가려진' 작가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작가의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면 작가가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기도 하고 내가 적은 리뷰를 작가의 개인 sns에 공유해주시는 경우도 있다. 리뷰를 적지 않고 조용히 책장을 덮었더라면. 나 또한 내가 어떠한 책을 읽었는지 정리가 되지 않고 작가와의 연결고리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육아 또한 그렇지 않을까. 아이가 하원한 이후, 내가 퇴근한 이후는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나'의 존재는 세상에 없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데.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의 주도권을 갖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내 생각을 적고 그 생각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있다는 것. 아무리 내가 낳은 아이라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 있고 순간순간 나도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죄책감이 있는데. 글쓰기 공간은 '엄마는 육아를 하니까 아이를 위해서 나를 절제해야 해'라는 생각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는 곳인 것 같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이제야 브런치 공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걸음마 단계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코로나 19로 인한 불안감과 육아라는 두 가지를 제거하더라도, 나는 읽고 쓰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