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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계엄

재난이 되어버린 일상, 다시 세워야 할 상식.

by 마음자리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내려가 버린다. 열린 문, 맨홀 같은 깊은 통로에 두 손을 꼭 붙잡고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자 놀랍게도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와 나를 태워준다.

막내!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막내를 찾아야 해.
좁다란 골방 같은 아파트 한켠. 두세 명의 남자가 모여 뉴미디어 시대 변화가 필요하다며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막내를 찾아 정신없이 지나가는 와중에 그들은 가시오가피가 든 약도 광고하고 있다며 이걸 사야 한다며 나를 붙잡았다. 아니, 막내를 찾아야 한다고. 돌아서는 순간 그들 사이에서 호기심 가득한 막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구석에 끌고 가 귓속말로 '너 여기서 뭐 해. 이런 약 먹어본 적도 없잖아...' 막내는 얼른 책장사이에서 가시오가피 약을 꺼내 늘 먹던 약이라는 듯이 마셔 보이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 집안에 들어오니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똥기저귀들.

정신없이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집에 올라왔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얼른 가보라고 재촉을 한다. 골방에 제사상이 놓여있고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앉았다. 엄마는 나를 째려보며 상에 흰 종이라도 깔아야지... 라며 나무란다. 아... 흰 종이... 구석에 어디 뒀더라... 흰 종이를 찾아 들어가니 어린 딸이 돌아가신 할머니 곁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요즘 통 잠을 못 잔다. 한두 시간을 자다, 설풋하게 깨고... 그래서인가... 정신없는 꿈을 꾼다.

무언가를 놓치고, 놓칠까 봐 종종 거리고, 일상이 지저분하고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꿈

아들러는 꿈에서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겨우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이를 찾아다니고, 집안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을 치우고,

그리고 초상을 치르며 그 곁에 잠든 내 아이를 보는 꿈.

우리의 일상은 마치 인공호흡으로 연명하는 환자처럼 겨우겨우 아침이 되고 또 저녁이 되어있었다.


사법부, 그들의 계엄


12.3 계엄으로부터 넉 달이 지나가고 있다. 군대가 쳐들어오는 계엄은 용케 막았으나 사법부의 계엄은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법을 잘 알고 있을 검사, 판사, 헌법재판관들의 놀라운 법기술을 보면서 지난 넉 달 동안 우리의 삶은 천천히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그가 범죄자이며 내란범이라고 플래카드가 붙었었다. 2심의 무죄판결과 함께 수십 장의 판결문 속에서 나온 실상. 이게 지난 몇 년간 그에게 씌워진 사법리스크라는 건가.

법을 모르는 무지렁이 같은 나는 너무 어려워서... 그래도 그가 뭔가 그럴듯한 일을 벌인 줄 알았다. 고작 사진 조작이라니. 기억을 못 한다는 말을 가지고 징역형에 집행유예로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판결이었다니.


헌재를 보호하기 위한 경찰의 숙박비는 수십억이 넘어간다고 했다. 그 위대한 헌법재판소를 지켜내는 동안 땅이 꺼지고 온산은 불타고 사람은 죽어갔다. 수백만이 목놓아 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지만 헌재는 마치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침묵 속에 빠져 있다. 기어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었던 그를 왕좌에 돌려놓을 셈인가.


그들에게 당연한 일들.


오래전부터 법은 우리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사법부의 계엄이 놀라웠음에도 놀랍지 않다.

800원의 커피값을 내지 않은 노동자의 파면은 당연해도 계엄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처단한다던 대통령의 파면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보다.


권력에 힘을 더해주고, 법관이 되면 부자와 결혼하여 그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권력자들이 싫어하는 정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가 되어주는 것. 그들 자신에게는 결코 법의 정의를 묻지 않는.

일제시대부터, 5공, 6공의 수많은 정치사범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이거나 가두는 일에 자신의 이름을 명예롭게 적어나갔던 그들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사법부를 개혁하겠다는 정권이 들어서지 않게 하기 위한 그들의 소리없는 계엄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사태를 부끄러워하는 어느 검사, 판사의 목소리 하나가 이리도 귀한가.


그러니 수백만의 간절한 호소도, 나라의 명운도, 자신의 아들딸들이 살아갈 이 나라가 참혹하게 무너진다 해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권력자의 편에 있는 한, 함부로 어딘가로 끌려가지도 경찰에게 폭행당하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오히려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대출도 취업도 잠긴 문은 환하게 열리고, 범죄는 소리 없이 감추어지고 지워지는 이 편한 세상. 어쩌면 내란범보다 더 그들, 스스로가 이 황금같은 특권을 포기하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돈을 많이 벌고 똑똑해져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게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는 소위 엘리트들의 삶이 미래세대의 성공 비전이 될순 없지않은가. 언제부턴가 '엘리트'란 단어가 양심과 공감이 없이 시험만 잘치는 소시오패스를 뜻하는 멸칭이 되어가고 있다.


정직하게 노동하고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며 일상을 챙겨가는 시민들의 평범하고 건강한 삶이 조롱받는 것은 우리가 모두 병들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상식. 사회적 관심. 용기


아들러는 부조리한 상황은 상식, 사회적 관심, 용기의 부족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독재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상식.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는 상식.

사람의 생명은 재난에서도, 계엄에서도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상식


이 당연한 상식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더 촘촘히 서로를 잡아주고 위로하고 돌보며 함께 움직여야 한다.

땅이 꺼지고 온산이 불타더니 바람이 다시 불고 눈이 내린다.


봄이 봄이어야 하는 상식.

그 조차 쉽지 않은가 보다.


2025년 3월의 겨울

다시 참혹하고 슬펐던 4월이 시작되고 있다.

알아서 잘 해주겠지. 막연한 희망회로는 더이상 의미가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이 공기처럼 당연해야하는 상식을 지키기 위해 함께 모여 더 용맹해져야한다.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의 재앙을 건너 응원봉을 들고 거리를 지키는

그 아름다운 이들에게 다시 4월의 참극을 맞지 않게 할 책임.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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