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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Sep 28. 2016

화도 나들이

나미래의 여행이야기


   화도나들이라는 작은 배를 발견했다. 고흥군 도양읍 소재지의 녹동항에는 작은 어선들과 관광선인 배들이 뒤섞여 연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화도와 하화도 두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소록도 배 타는 곳 근처로 가라.’고. 70년 이상 이곳 지역에서 살아온 친정아버지의 입김으로 화도로 가는 배의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낚싯배와 관광선의 중간 정도인 듯한 작은 ‘화도나들이’ 배가 정박해 있는 곳에서 아이와 내가 잠시 서성일 때다. 한 사내가 배 안에서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햇볕에 살갗이 심하게 그을린 바다 사내에게서 차가운 바람이 끼쳐왔다. 화도를 향해 출항하는 배 시간을 간략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SNS 정보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묻고 있는 내가 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화도 배를 타기 며칠 전, 아들과 나는 친정으로 여름휴가를 떠나왔다. 태평양 열대판이 한반도를 비켜가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8월 초의 뉴스 기사는 친정 거금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녹동항으로 먹을거리를 사러 나온 나는 그 사내에게서 하루에 세 번 있다는 배편 시간을 확인했다. 바로 옆 섬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발을 옮기지 않은 작은 두 섬을 둘러보고자 하는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놓았다.


녹동에서 화도와 하화도를 들어가는 배편, 화도나들이라는 선박

  

  녹동항은 바다가 안고 있는 많은 섬들에게 출항을 기다리는 배로 가득 찼다. 파도 이랑에 우리를 화도로 데려다 줄 배가 심하게 출렁인다. 배와 바다에 걸쳐둔 나무 사다리에 아들이 몸을 먼저 올릴 수 있도록 엉덩이와 손을 잡아주었다. 오후 정오를 지난 바다는 은빛물살에 태양이 떨어져 앉아 강렬한 선들을 반사하고 있었다. 서너 명의 아주머니들이 이미 화도나들이라고 적어진 작은 배 안에 앉아 이방인의 방문을 궁금해하는 눈치다.

 

 “어디서 오셨소?”


  그중에 호기로운 중년의 아주머니가 한마디를 건넨다. 어색하게 배 안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아들과 함께 들어가 앉았다.


  “아, 저기 옆의 거금도 금산에서 왔어요. 신금이 고향이고요. 살기는 서울에 살아요.”


  나는 어르신들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도 친근함을 섞었다. 어떤 질문을 계속해서 쏟아낼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말이다. 다만, 동탄에서 산다는 것은 서울로 대신하였다. 어른들에게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이야기할 경우, 동탄을 포함한 경기 어느 지역은 서울이라는 커다란 수도 이름으로 묶는 것이 편리할 때가 많다. 나는 어른들의 익숙한 질문에 기계처럼 대답을 하고 앉았다. 이렇게 가벼운 질문이 오고 간 것을 계기로 아주머니들에게 살갑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배가 몇 번 안 가나 봐요. 3편인가 있던데…….”

  “오메, 세 번이나 있는디, 우리한테는 익숙해라우. 시간 맞춰서 나오니 우리는 괜찮하요.”

  “아, 그래요? 지금 한 시 배로 들어가면 몇 시 경에 나오나요? 두 섬 다 볼 수 있나요?”

  “글 쎄라. 바로 나와야 할 것인디. 지금 한 신디 말이요. 화도에 먼저 들렸다가 두 시에 하화도에서 배가 나온단 말이요. 30분 정도면 두 섬으로 다 간당께. 섬으로 하루에 세 번 들어가도 마지막 4시에 들어가는 배는 녹동으로 안 나와라. 화도에 먼저 들리고, 그리고 상화도에 들리제. 아따, 시간도 없구먼 어짤라고.”


  섬을 돌아볼 시간이 많이 없음을 알아내고 나의 머리는 무지근해졌다. 배 안에 앉아 있던 네 아주머니들은 시간도 제대로 모르고 온 여행자에게 걱정이 집중되었다. 이방인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함께 갔던 아들에게 질문이 쏟아진다. 질문들을 받느라 아이의 입도 잠시를 쉬지를 않았다. 며칠 전 분명 하루에 세 번 있다는 배 시간은 화도 배에서 내린 한 사내에게서 확인을 했지만, 오후 4시 이후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배 안의 아주머니들을 통해 들을 수 없었다. 하화도에 살고 있는 원주민이 배를 운행하고 있기에 섬에 정박시키고, 다음 날 오전이 되면 녹동항으로 첫배 시간을 맞춰 출항을 한다는 아주머니들의 친절한 입말이 계속되었다.


  육지와 바다가 더욱더 열정적으로 만나는 만조 시간이다. 여름 바다 위에 작은 배는 힘이 넘쳤다. 배 창 안으로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은 하얀 물길은 우리들을 반기는 눈치다. 파도를 타는 뱃머리의 주변은 팔딱거리며 뛰어오르는 은빛 고기들이 길을 열어주는 듯했다. 쿨렁 이는 파도 위에 바짝 고개를 올린 작은 배의 이물은 깊은 물살을 가로지르기를 반복했다. 엇비슷한 풍광을 빚어내는 고향 근처 화도는 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들어가야 했던 불편한 곳으로 듣고 자랐다.


고향 거금도 신금 친정 집 옥상에서 바다를 향해 눈을 올리면 시야에 자연스레 들어오던 두 섬이다. 화도로 가는 배보다 몇 배나 컸던 둔탁한 거금도행 철부선(이하 철선이라 칭함)의 움직임이 사라진 것은 2011년도의 일이다. 화도에서 남서쪽으로 3킬로 남짓한 고향 거금도에는 기나긴 산고 끝에 연도 연육교가 완공되었다. 녹동과 거금도를 오갔던 ‘녹동-금진’,‘녹동-신평’ 행의 철선의 이름도 2011년 12월 이후 섬 주민들 사이에선 점점 잊혀가는 사어(死語)가 되고 있다. 이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두 대교를 건너 친정을 오고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뭍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며 사람들로 많이 북적해지는 것에 불편해하는 친정아버지의 걱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친정 거금도에서 보이는 하도(상화도)와 하화도

  화도 옆에 큼직한 거금도엔 대교 완공 이후 철선으로 실어 나르던 차들의 발이 가벼워졌다. 차가 없는 화도와 제일 큰 차이점이다. 육지에 발을 걸치고 연결된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를 따라 많은 차들은 섬의 해안선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한다. 주말마다 거금도로 산행을 하기 위한 사람들로 또한 붐비기 시작했다. 바다가 맞닿아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해발 592미터의 적대봉은 능선이 부드럽다. 부드러운 능선만큼 다도해의 많은 섬들을 넉넉한 시선으로 끌어안고 있다. 특히 둥글게 쌓아 올린 산 정상 봉화대에 올라서면 화도와 하화도가 고흥반도 마지막 육지 아래서 푸른 등뼈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치 숟가락과 주먹밥이 떨어져 있는 형상과도 같다. 화도와 하화도는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린다. 섬과 섬으로 오고 가는 그 길을 자주 내어주지 않는 것은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과도 같은 맥락이겠다. 섬과 섬 사이에 썰물의 징조라도 보일라치면 산 정상 높은 곳에선 더욱 선명하고 또렷하게 길을 향하도록 눈길을 쏟게 한다. 마치 굵은 동아줄을 엮어 직선으로 도화지에 선을 그어놓은 것 같다.


  배는 10분여 정도를 달려 육지에서 가까운 화도에 몸을 살짝 걸쳤다. 하화도로 곧 떠나야 하는 배 안에 할머니 한 분을 남기고 나머지 분들은 따사로운 햇살을 피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모자는 섬에서 빠져나올 40분을 계산하며 하도에서 내리는 것을 고사하고 하화도까지 가보기로 한다. 열기 속에 닫혀 있는 화도의 방파제엔 육지로 실려 보내는 농촌의 먹거리들이 배로 들어올 준비를 한다. 5분을 더 달려야 하는 배 안에 남아 있는 인자한 할머니는 하화도의 주민이었다.


  “하도(화도)는 언덕배기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어. 근디 여기 화화도는 바로 갯길하고 언덕길 바끼 없는디. 도착해서 오른쪽으로 돌다가 교회 올라가서 쉬다가 가면 되어.”


  시간을 많이 들고 오지 않은 두 모자를 향해 배 안에 끝까지 남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걱정스러운 말을 이어가신다. 전망대에서 교회로 올라가는 산책로를 염두에 두고 말을 걸어주신 듯하다. 이 길 주변에는 해안 데크길이 있음을 지도로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화도 해안 데크길을 걸으며

  

  아들과 나는 꼿꼿이 우리 곁을 따라오는 햇볕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강한 여름이었다. 금방이라도 몸이 녹을 것 같은 표현이 어쩜 딱 어울릴 수도 있었겠다. 잔멸치를 삶아

널어둔 그물이 보인다. 방파제 시멘트 길 위에 넓게 펼쳐진 멸치는 수분을 진작 빼앗긴 지 오래다. 아주머니 한 분이 햇볕을 등지고 이물질을 걷어내고 있었다. 아들과 나는 멀리 돌아가지 않은 여행길을 택했다. 바다를 앞에 두고 그늘만 하나 있어준다면 하는 바람을 모으고 있었다. 하화도에 도착해 산책로를 향해 걸어가자 두 평 남짓 되는 그늘 쉼터의 의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해안 데크길 사이에 놓인 작은 정자와 함께 말이다. 바닷길로 하화도에서 화도가 제일 가깝게 보이는 곳에서 30분이라는 시간을 얻어내기만 했다. 우리가 짧은 시간 중 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한낮의 더위에 어린아이의 몸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들고 갔던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내 나와 아들은 각각 한 편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작은 섬과 대화를 나눴다. 섬의 냄새와 기운이 마냥 좋았다.


  

  하화도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서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을에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있는 뱃길을 향해 육지로 이동을 한다. 간혹 뱃길이 끊기거나 섬에 들어와 쉼을 선택한 사람들을 위한 펜션이 바다를 향해 세워져 있었다. 작은 섬에 어울리지 않은 근사한 색깔 벽돌집의 모습이었다. 섬에 남아 있는 노약자의 원주민들은 몸이 불편하면 느린 배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성장해 객지로 흩어진 자녀들에게 몸을 위탁하기도 한다. 15가구가 되었다가 20가구가 되었다가 25가구가 되기도 해라.라고 했던 아주머니들의 고무줄 가구 조사 답변은 그들의 삶 속의 대화이며 능청스러움의 유모라고 생각했다. 물론 함께 사는 섬에 이웃들이 나이를 먹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답변이었을 것이다. 이방인에게 솔직하게 내어줄 수 없는 그들의 속살이었다.


  작은 섬에도 둘레길이 조성되어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오솔길을 지나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여행자의 정보를 내어주어야 한다. 고향은 어디이며, 현재 사는 지역 정보는 바로 나와야 한다. 바로 근처 거금도의 출신이면 누구의 자녀인지 설명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야 하며, 나이를 밝히는 것까지 어려워 말아야 한다. 화도나 하화도는 점점 빈 집이 늘어가지만, 빈 집을 팔거나 내어주는 것은 아직 없는 일이라고. 아직 투기의 물결이 덮치지 않은 섬이었음은 분명했다. 먼 옛날의 일 같지만, 5년 전에 다녔던 거금도 바닷길과 느림의 순간이 비슷했다. 섬의 위치는 가까웠으나 바닷길 삼거리에서 헤어지는 아쉬움이 있었던 화도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200년 전, 섬에 입도할 당시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하여 불리었던 화도. 창창 울울한 연녹색의 수목이 섬 곳곳에 그늘의 서늘함을 안기고 있었다. 수풀들이 껴안은 봄꽃 야생화는 내년 이른 봄의 움직임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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