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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Sep 29. 2016

#나의 선택

나미래의 여행이야기_낯선 바다여행


     

 “글쎄요. 만약 저라면, 취소하고 가지 않을 것 같네요.”

     

7월 초는 사이판 가족여행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결혼 10주년 여행에 대한 계획은 함께 살고 있는 식구들에게 기대 이상의 들뜬 기분을 만들어준 최적의 상태였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지금껏 하늘에서 내려주시지 않은 귀한 임신을 한 지 5주-6주 째를 맞고 있었다. 산부인과 담당 주치의는 ‘여행을 취소하면 안 되겠느냐!’라며 한 마디를 더 거드는 것으로 내 눈의 동공이 확장되게 하였다. 편치 않은 내 눈동자는 이후 계속 흐려 있었다. 어쩜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었어야 옳았을지도 몰랐겠다.


  사이판을 향하는 값싼 제주항공의 기내는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지 않았다. 구름은 바다 하늘 위에서 구름을 낳고 바람은 날개 옆을 스치며 거친 울음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조용히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태평양의 넓은 대기 속으로 재빠르게 안내하고 있었다. 남편은 도떼기시장처럼 이것저것 싼 물건을 펼쳐놓고 파는 듯한 저가항공 기내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연신 돌린다.

     

  “싼 항공은 이제 좀 피하자. 아니다. 아니야. 기내식도 없고, 뭐 갖다 달래도 함흥차사잖아. 앞뒤에만 있다가 대답하고 끝이야.”

     

 그래 나도 값나가는 안정된 비행기 타고 싶었다. 한때 안정되고 멋진 항공사를 이용사를 이용한 적도 많았다. 아줌마 여자 사람이 되고 나서부터 내가 찾는 항공사는 저가항공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싱글 때는 외국항공사네, 국내 탑 항공사는 고루고루 섭렵했던 시절이 있긴 있었나 싶었다. 그렇다. 분명 저가항공이 없었던 일본 유학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었던 가난한 학생 신분이었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고향을 찾아 바람을 쐬었다. 그 비싸고 멋진 비행기를 타고. 도시에 사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다른 나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기점이 되기도 했었던 그 기억 속 항공사들은 아직도 호기롭게 살아남아 있다. 남편의 투정 거림을 들으며 모 문예지에 수필가로 등단한 소감을 정리하고 있는 나는 텟북을 바라보며 모른척하며 손 놀리기에 바쁘다.

     

 “어차피 떠나는 여행이라면 즐겁게 힐링하고 돌아오세요. 물속에 들어가는 가급적 피하셔야 합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 위험합니다.”

     

 중간에 주치의가 바뀐 여의사 선생님은 어차피 떠날 여행이라면 물에 들어가는 것만 주의를 당부한다. 고령 임신부 외 일반 임산부 누구에게나 주의를 주는 사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을 시킨다. 그래도 조금은 밝은 마음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사이판 공항으로 진입했던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전에 출발하면 이렇게 지연되는 일들은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면 조심스러웠다. 많이 걸어 다니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한국처럼 집 앞을 다녀도 차 시동을 걸며 자유롭게 오가던 그 두 발이 묶였다. 그러나 즐거운 여행 앞에서 혼자 유난 떨 듯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던 것은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다. 투어 가이드를 나온 담당자는 늦어진 시간은 호텔에서 보낼 것을 추천함과 동시에 시내 관광은 다음 날로 미루자는 타협을 능청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임신 5주의 위험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가까운 곳이면 오늘 중에 끝내시죠.’라는 말이 턱 앞까지 차올랐을 터였지만, 몸은 조금 쉬라고 나의 뇌에 전달을 했다.


  사이판은 시내 관광이랄 것이라고 딱히 없다고 했다. 좁은 섬에서 북부 지역을 관광하는 것을 시내 관광이라고 한단다. 조금은 새로운 정보였다. 새가 많이 날아드는 새섬, 2차 세계대전 참전의 참패를 기록하며 그들의 혼을 모신 일본군 위령탑, 일본군이 죽어서까지 패망의 소리를 올리고 싶지 않아 그들이 선택한 죽음의 자살바위(반자이 크래그),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사 작전이 이루어진 일본군 사령탑, 일본군이 강제 연행한 조선인이 학살된 혼을 위로하는 한국인 위령탑의 순서로 관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관광 순서를 듣고 괌, 사이판 여행 책자를 뒤적이기 바쁘다. 호텔방은 편안하게 누워 정보를 쉽게 얻어내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시켜 주었다.


  가이드의 설명대로 사이판 북부에 모든 관광 포인트가 집결해 있었다. 많이 걷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소 오르막이 있는 길을 걸어야 했던 임신 초 임산부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많이 걷지도 않았다. 발이 옆으로 살짝 삐꺽거렸다. 여름 한 철용으로 싸게 구입한 샌들 한 짝이 날름 선을 하나 잡아먹었다. 남편은 신발 떨어진 아내를 위해 본인의 아쿠아슈즈를 양보하며 열로 덮인 아스팔트 위에서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게 맞지 않은 불편한 신발을 신고 관광지 4곳을 돌았다. 한 곳에 몰려있는 관광 포인트는 각각 살벌하게 우리에게 역사의 아픔을 다시 한번 인식시켜 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물론 나에게도)는 일본군이 못된 악마로 보였을 터였고,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민족성을 드러내는 것이 현재에도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렇지만, 역사 앞에 오래된 일, 잊혀가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아직 많이 알지 못해 나의 머리는 자유롭지 못했다. 일본군 사령 비 사이사이에 씹다 붙인 껌 흔적을 남겨 둔 것을 보았다. 나의 머릿속에서는 ‘그래도 저러면 되나?’라는 이성적인 잣대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끓어오르고 있던 나의 몸이었다. 밖으로 보이지 않은 나의 속내는 어떤 고민을 했을지 알 수 있었기에.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최대 피해국이었던 한국인, 중국인 등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의 감정을 곱게 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볼 수 없을 것이기에.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판단에 의지해야 했다. 호텔 밖을 나가면 즐비해진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 식사를 하고 난 후의 만족감과 불만을 가족과 함께 표시해 보는 방법이 있다. 또한 가이드 책에서 자세히 펼쳐낸 맛집을 찾아보며 책자와 블로그에 나와 있는 평과 비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 일행은 조식이 한 번 포함된 투어로 하루 두 끼는 호텔 밖에서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과 중 하나였다. 적당한 걷기 운동과 적당한 공기 순환 운동은 몸에도 활기찬 기운을 불어넣은 듯하다. 사이판에서의 맛집은 대부분 나쁘지 않은 선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적당히 허기진 몸의 기운이 따라다니다 보니 우리 한국인의 입맛에 맞으면 더욱더 금상첨화가 되었고, 양이 부족하지 않으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라고 작은 브라보를 외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엉망이 된 집도 등장하기 이른다. 간판과 책자의 정보를 의지하여 들어간 ‘후루사토, 고향’이라는 일본 음식점은 많은 것들이 엉망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40분이 넘어서도 밥 하나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4명이 찾아간 그곳에서 식사를 전부 같이 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하였다. 각자의 밥이 다 따로 나왔다. 누가 한 명 먹고 나면 또 얼마 후, 나머지 한 사람의 밥이 나오는 순이었다. 먹거리 선택 정보에 탁월한 안테나를 세우며 우리 가족을 안내했던 나의 조카의 예상이 한 발 빗나가려 치면 그녀는 조금은 우울해 보였다. 임신 초기의 정보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남편과 조카에게 알리고 함께했던 여행이었다. 피곤해하는 이모를 배려하며 엄마의 임신 소식을 모르는 9살 아들 녀석을 살뜰하게 챙긴 그녀는 나의 히로였다.


 사이판이라는 섬 자체는 놀거리가 산재해 있는 환상의 섬임에는 틀림없다. 호텔 리조트에 딸린 수용장에선 언제든지 수영이 가능했다. 리조트 앞에 펼쳐진 남태평양의 출렁거림의 소리는 언제든지 우리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들은 리조트 내에서 수영을 즐겼지만 나는 최대한 몸을 아끼며 휴식을 취했다. 사실 더 쉬고 싶었다. 시원한 호텔방에서. 놀이의 절정에 달했던 장소가 바로 마나가하 섬이었다. 환상의 일정으로 손꼽고 가장 즐거워하는 모습을 감출 길이 없는 가족들은 들떠 있는 축제 분위기였다. ‘어차피 바닷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호텔에서 편히 쉬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함께 섬으로 들어가는 작은 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으며, 마나가하 섬에 도착해서는 가족들이 모습이 담긴 영상을 내 눈으로 넣기 위해 쉬면서도 머리 위로의 감각은 가족들을 향해 있었다. 책은 손에 들었지만, 습기 가득한 모래 위가 휴식처가 되었다. 비치 의자는 결코 편안한 장소 제공이 되지 못하였다. 스노클링으로 재미를 붙인 가족들은 이쪽저쪽 바다를 옮기며 신비한 체험을 이어간다. 한바탕 내린 소나기는 내 옷을 빠르게 적셔 나가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저가항공의 비행기는 우리를 무사히 한국으로 데리고 와 주었다. 유산 주의 여행에 가장 민감했던 부분이었기에 촉을 세우고 있었지 싶다. 아들은 떠나오는 이륙 비행기 안에서 ‘사이판을 떠나기 싫어요.’라며 즐거웠던 시간에 대한 표현을 짧은 문장 안에 다 쏟아낸다.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일주일 후에 최종 판단하죠.”

     

  일주일 후, 7-8주 사이의 주수에 맞게 아이가 크지 않는다는 검사 결과와 심장소리가 작다는 초음파 결과를 받았다. 여행의 즐거움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어둠 속 여행의 징후를 예감했다. 일주일 동안 시체처럼 누워서만 지냈던 것은 괴로운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을 품었다기보다 심장만 살짝 만들어졌다 꺼져간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를 하고 싶었던 어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출장 나간 남편에게 기댈 수 없는 나의 사정 따윈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나의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문학 스터디 한 분의 선생님은 나에게 엄마와 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해 주고 계셨다. 유산 소파 수술을 위해 침대에 오를 때 따스한 눈빛은 크나큰 등이 되고 있었다. 마취가 덜 되어 아픔을 계속 느꼈던 순간에서부터 깨어나서 내가 웃을 때까지 꼭 잡고 있었던 그 손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녀가 끓여서 내게 안겨준 큰 냄비 속 미역국은 정말 시원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미역국의 정체를 걷어내고 부지런히 잘 먹고 일어나고 싶었다. 부끄러워서, 조심스러워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던 기쁨의 소식은 조용히 나만 아파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수술을 마친 후, 캠프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아껴둔 말을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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