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응급실에 다녀오신 이후로 저희 어머니의 컨디션은 영 회복이 되질 않고 있어요.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거라 머리는 계산을 하고 있지만 계속 누군가 엄지와 검지로 제 구렛나룻을 살짝 쥐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아플 정도로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살짝 쥐고 있는 정도에요. 신경이 집중되질 않고 가슴 구석에 볼펜심 정도 크기의 구멍이 나서 그리로 마음이 똑똑 새고 있는 기분이에요.
점심을 먹고 가라앉은 기분도 끌어올릴 겸 어머니랑 나란히 앉아 넷플릭스로 영화를 봤어요. 전에 추천해드린 적 있었던 '바르게살자' 기억하시죠? 코미디언 분들과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분들은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천국에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고 전 생각해요. 웃음이 없는 곳이 천국일리가 없잖아요. 누군가를 웃게 해준다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일 거예요.
영화를 보기 전 미리 다녀올 걸 그랬다, 뭔가 순서가 안맞았다 생각을 하며 편의점에 가서 택배를 부치고 2+1으로 묶인 쌀과자를 사왔고, 어머니가 주무시는 걸 확인한 후 방에 들어와 유튜브 알고리즘이 올려준'멜로가 체질' 클립을 보며 실없이 키득키득 웃었죠. 몇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손석구 배우가 전여빈 배우에게 소줏잔을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하죠.
"Here's looking at you, kid.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대산데, 하, 우리나라에서 참 멋지게 번역됐지.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그리곤 반사적으로다가오는 잔을 피해 진짜전여빈의 눈동자에 자신의 잔을 가져다 대요.
이 장면은 백만번을 더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요.하필 배경음악마저도 감미로워서 더더욱이요.
어떤 고요는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어떤 고요는 불안을 불러일으켜요. 결국 고요의 문제가 아니라 제 마음의 문제겠죠. 불안은 상상력을 키우고 상상력은 다시 불안을 불러일으켜요.
문득 불안해진 저는 다시 안방 문을 열어봤고, 어머니는 모로 누운 채 친구분과 웃으며 통화를 하고 계셨어요. 친구분은 어디가 넘어져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는 병원 다녀오고 예약한 이야기를 웃으며 하시더군요.
부엌으로 들어간 저는 저녁에 먹을 순두부찌개를 끓였죠. 원래는 바지락이나 차돌박이, 대패삼겹살 같은 걸 넣고 끓이는 데 아무것도 없어서 빈 맛은 동전육수 하나 더 넣어 채웠고 그러고도 모자란 맛은 설탕을 조금 넣었어요. 그러니 나름 먹을만 해지더라고요.
방에 돌아와보니 동생에게 전화가 두 통 와 있더라고요. 어머니 상태를 확인하려고 전화를 한 건가 하고 콜백을 했는데 안 받더니만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를 하겠데요. 전화는 오지 않았고 잠시 후에 카톡이 들어왔어요.
"맹장염인 줄 알고 병원에 왔는데 게실염이래. 항생제 처방 받고 나아지면 집에 갈거고 아니면 수술해야 한데. 애들은 시댁에서 봐주고 계셔. 엄마도 안 좋아서 굳이 이야기 안했어."
저녁을 먹는 동안 저는 동생 입원 관련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요. 돌아와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전에 다니던 직장 선배에게 전화가 왔고, 20분 정도 푸념을 들었지만 제 하소연은 하지 못했고요. 대신 이렇게 글을 써요.
i know, i know, i know... 마른 세수를 하며 계속 이렇게 되뇌어봐요. 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보다 심각한 일이 한두 개인가요? 머리가 갑자기 아플 때면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듯, 이런 일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싶으면 쓸만한 일들이 이미 너무 많죠. 당장 '미쳤나' 싶은 소식이 뉴스란을 가득 채우고 있고, 화나고 짜증나는 이야기들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진짜로 저를 괴롭힐 이야기들은 1500원을 향해 달려가는 환율 같은 것이죠. 다음 달과 그 다음 달 카드값은 어떻게 메꿀 것이며,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 경기에다 캄캄한 미래전망을 보태면 사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일이주? 아니 며칠만 지나도 별일 아닌 것처럼, 원래 고민하기로 했던 연초 가족여행 계획 같은 걸 짜고 있을지도 몰라요.
밥을 꾹꾹 떠넘기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시간이 갈 수록 말 못 할 이야기들이 하나둘 늘어나요. 왜 말을 못 하는 건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냥 말 못 할 이야기들이 마음 벽을 얌체공먀냥 제멋대로 콩콩거리며 뛰어다닐 뿐이죠.
여기까지 쓰고 이 이야기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교환하지 않을 내 일기장에 쓰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무작정 이런 이야기를 쓴다는 게 혜리 님 입장에서는 싫을 일이란 생각을 하다가, 혜리 님은 착한 사람이니 제가 이 글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는 걸 더 서운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라고 괜히 혼자 땡깡도 부려보다가, 누군가를 제 편의대로 착한 사람 만드는 저의 알량함에 쓴 웃음을 짓다가, 이럴 땐 '에라 모르겠다'가 최고라고 다시 고개를 내젓기도 해보죠.
그러다 생각해요. 이렇게 적어야겠다. 캐치볼을 하듯 멀리서 내 하소연을 한 번만 받았다가 다시 돌려달라고.
사실 여기까지 적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지럽게 튀어오르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어요. 우리 교환일기 제목만큼 무탈함을 향해 많이 이동했어요. 가라앉은 것만큼 많이 부끄럽기도 하고요. 혜리 님이 문득 저랑 교환일기 하자고 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세상 일이 뜻 대로만 되는 건 아니죠(급뻔뻔). 그러니 말했듯 제게 화 내고 싶을 땐 화도 내고 이건 아니다 싶어지면 아니라고 말해도 좋아요(계속뻔뻔).
부탁 하나만 할게요, 혜리님. 아프지 말고요. 어디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줘요. 하나가 아니라 두 개네요. 미안해요. 오늘 제가 이래요. 부디 좋은 저녁이시기를(급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