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해 보이는 일상 속, 매일을 일으켜 세우는 소녀

[별세개반이상만 #63] <세계의 주인>

by 양미르 에디터

반장에 모범생, 학교의 '핵인싸'. 열여덟 살 '이주인'(서수빈)은 교실을 휘젓고 다니는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깔깔대고, 남자친구 '찬우'(김예창)와는 빈 교실에서 서툰 키스를 나누기도 하죠. 담임 선생님 '양보아'(이상희)에게 사과 장난을 치고, 단짝 '유라'(강채윤)의 19금 웹툰 고민을 들어주며, 어린이집 원장인 엄마 '강태선'(장혜진), 마술을 연습하는 남동생 '해인'(이재희)과 함께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인데요. 주말엔 봉사활동도 나가고, 태권도장에 다니던 언니 '미도'(고민시)와도 자매처럼 지내죠.

그러던 어느 날, 성범죄자 출소 소식이 동네를 뒤흔듭니다. 같은 반 '수호'(김정식)는 어린 여동생을 걱정하며 전교생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시작하죠. 모두가 흔쾌히 사인하는 가운데, '주인'만이 서명지의 '표현'을 문제 삼으며 완강히 거부합니다. 설득하려는 '수호'와 팽팽한 실랑이를 벌이던 '주인'은 결국 화가 나서 교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한마디를 내뱉죠. 그날 이후, '주인'에게 익명의 쪽지들이 배달되기 시작합니다. 쪽지는 '주인'을 추궁하고, 친구들의 시선은 미묘하게 변하죠.

4763_4806_425.jpg 사진 = 영화 '세계의 주인' ⓒ (주)바른손이앤에이

윤가은 감독은 편집 단계에서 바흐의 칸타타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를 영화 <세계의 주인> 속 유일한 음악으로 선택했습니다. "현명한 통치자 아래 양들이 안전하게 풀을 뜯는다"라는 주제를 담은 곡으로, 감독은 이를 '주인'의 삶에 빗댔죠. "'주인'이 자기 삶의 주이자, 통치자로서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매일 같은 훈련과 노력을 반복하며 일상을 가꿔나간다고 생각했다"라는 것입니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이죠. 하지만 그 평온함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닌데요. 누군가는 목초지를 가꾸고, 울타리를 세우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주인'의 일상도 마찬가지죠. 겉으로는 쾌활하고 장난스럽지만, 그 평온함은 매일 아침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세계의 주인>은 이 '평온함을 유지하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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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은 윤가은 감독이 10년 이상 품어온 이야기인데요. 처음엔 '10대 소녀의 성과 사랑'을 다루려 했죠. 하지만 시나리오를 쓸수록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결이 느껴지는 은은한 영화가 아니라, 어쩐지 슬프고 험악한 이야기"가 된 것이죠. 윤가은 감독은 10대 여자 아이의 성과 사랑을 이야기할 때 폭력의 경험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목 '세계의 주인'은 15년 전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위해 지어둔 것이었죠. 윤 감독은 이 제목이 "소박하고 당연한 바람이 깃든 제목"이라고 언급했는데요.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을 지나왔든,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걸음을 걸어간다면 삶의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덜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라며, '주인'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책임지고 움직이는 진짜 '주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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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2016년), <우리집>(2019년)에서 윤가은 감독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세계를 그렸는데요. 하지만 <세계의 주인>은 다르죠. 인물과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3인칭 시점을 시도했는데요. 감독은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인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들이 서로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축조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 거리감이 영화에 독특한 긴장을 만들죠. 우리는 '주인'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인'이 왜 서명을 거부하는지, 왜 사과를 보면 불편해하는지, 왜 감정 기복이 심한지 알 수 없죠. 카메라는 관찰자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인'을 지켜봅니다. 덕분에 관객은 '주인' 주변 사람들처럼, '주인'을 '판단'하거나 '해석'하려 애쓰게 되죠. 그리고 진실이 서서히 드러날 때, 우리가 얼마나 섣불리 타인을 재단했는지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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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쪽지는 누가 보낸 걸까요? 영화는 끝내 밝히지 않습니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데요. '주인'을 향한 수많은 쪽지는 '주인' 내면의 소리이자 고정관념이죠. 누가 보낸 건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폭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강조합니다. '주인'의 동생 '해인'은 매일 밤 가족 앞에서 마술을 연습합니다. 마술의 클라이맥스는 "이 세상의 모든 걱정과 고민들이여, 영원히 사라져라!"인데요. 이는 누나를 위한 마술이죠.

하지만 마술은 실패합니다. 세상의 고민은 마술처럼 사라지지 않죠. 그래도 '해인'은 계속 연습합니다.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 믿으면서요. '주인'은 자기 세계의 주인입니다. 양들이 풀을 뜯듯, 묵묵히 자신의 일상을 가꾸죠. 때로 넘어지고, 울부짖고, 흔들리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을 견뎌내죠. 그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

2025/10/22 메가박스 강남


※ 영화 리뷰
- 제목 : <세계의 주인> (The World of Love, 2025)
- 개봉일 : 2025. 10. 22.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9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윤가은
- 출연 : 서수빈, 장혜진, 김정식, 강채윤, 이재희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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