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아닌 인간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정신 세계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51] <물의 연대기>

by 양미르 에디터
5008_5573_1214.jpg 사진 = 영화 '물의 연대기' ⓒ 판씨네마(주)

2017년,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킨들로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회고록 <물의 연대기>를 읽다가 40페이지 만에 책을 덮고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건 무조건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8년, 500가지 버전의 대본을 쓰고 다시 쓴 끝에 탄생한 영화 <물의 연대기>는 원작 회고록의 영화화라기보다, 그 책을 읽고 전율했던 한 배우의 내밀한 고백에 가깝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건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삶이지만, 관객이 진짜로 마주하게 되는 건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예술가의 정신 풍경이다.


영화는 샤워실 배수구로 흘러내리는 피로 시작된다. 주인공 '리디아'(이모젠 푸츠)가 사산한 아기를 낳은 직후의 장면이다. 카메라는 '리디아'의 무릎에 새겨진 타일 자국을, 파란 손가락을, 분홍빛 입술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 밀착 촬영은 관객에게 어떤 거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리디아'의 고통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강제로 끌려 들어가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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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메달을 꿈꾸던 수영 선수였던 '리디아'는 각종 대회를 휩쓸며 장학금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방관하는 어머니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버지 '마이크'(마이클 엡)는 깔끔한 안경과 단정하게 셔츠를 집어넣은 건축가로, 겉보기엔 평범하고 점잖아 보이는 중산층 가장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거의 전신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너무 무서워서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라이터 소리만으로도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그는 '리디아'의 대학 합격 통지서를 읽으며 냉소한다. "반액 장학금은 네가 필요 없다는 뜻이야." 영화는 성적 학대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리디아'를 향한 카메라는 그대로 두고 아버지의 목소리와 소리만 들려준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끔찍하다.

대학 생활은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추락이다. '리디아'는 술과 마약에 빠져들고,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으며 자기 파괴의 길을 걷는다. "나만의 마약, 나만의 섹스, 나만의 친구, 나만의 자유"라고 되뇌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감옥이다. '리디아'는 상냥한 포크 가수 '필립'(얼 케이브)과 결혼하지만 그의 다정함이 오히려 견딜 수 없다. 학대당한 사람은 사랑받는 법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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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후 언니 '클로디아'(소라 버치)의 집에 머물지만, 아기는 죽은 채로 태어난다. 이후 '리디아'는 정반대 스타일의 남자 '데빈'(톰 스터리지)과 관계를 맺는다. 그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리디아'를 벽에 내동댕이친다. 어쩌면 그게 그가 아는 유일한 친밀감의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전환점은 오리건 대학교 켄 키지의 글쓰기 워크숍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이자 반문화 운동의 아이콘인 '키지'(짐 벨루시)는 낡고 지친 전설이지만, 여전히 강력한 스승이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감독 노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8년 동안 글을 쓰고 또 썼다.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작품이 광활하게 느껴지길 원했고, 삶의 신경학적이고 번쩍이는 꿈처럼, DMT 마약 경험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실제로 영화는 마약 경험에 가깝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화면은 거칠고 흔들리며, 컷은 예고 없이 점프하고, 사운드는 날카롭게 귀를 찌른다. 책상 치는 소리, 뺨 때리는 소리, 물잔 내려놓는 소리가 과장되어 들린다. 타이트한 클로즈업은 배우의 얼굴 주름과 근육 떨림만 보여주며 관객의 도피처를 차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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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이 모든 형식적 실험이 '리디아'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기 위한 게 아니라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신의 예술적 충동을 표출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물의 연대기>는 영화는 묘하게 이중적이다. "여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거의 모든 것을 혼자 간직하라고 배웁니다"라는 감독의 말은 '리디아'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하이틴 스타'에서 <스펜서>(2021년)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까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줄곧 타인의 시선과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물의 연대기>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로, 자기 방식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작품이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날카롭고, 때로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2시간 넘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거의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똑같은 이미지가 반복되고, 소음은 계속되며, 카메라는 여전히 얼굴에 들이대고 있다. 초보 감독의 야심과 한계가 물 위와 물밑처럼 확연히 나뉘어 보인다. 배우가 아닌 인간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본 경험은 흥미로웠다. 다음번엔 관객도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한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물의 연대기> (The Chronology of Water, 2025)
- 개봉일 : 2026. 01. 28.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28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크리스틴 스튜어트
- 출연 : 이모겐 푸츠, 톰 스터리지, 도라 버치, 짐 벨루시, 수재나 플루드 등
- 화면비율 : 1.33: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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