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50] <슈가>
12살 '동명'(고동하)은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친구들과 야구하고, 방과 후 떡볶이를 먹고 싶어 하는 평범한 아이. 그런 '동명'이 어느 날 쓰러진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1형 당뇨병'. 췌장의 베타세포가 파괴되어 인슐린이 전혀 분비되지 않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완치는 없고, 평생 혈당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 엄마 '미라'(최지우)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능력 있는 워킹맘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진단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손끝을 찔러 피를 내야 하는 채혈, 식사 때마다 맞아야 하는 인슐린 주사. '동명'은 화장실에 숨어서 주사를 놓는다. 친구들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미라'는 해외 사이트를 뒤지다 '연속혈당측정기(CGM)'를 발견한다. 팔에 센서를 부착하면 채혈 없이도 5분마다 혈당을 측정해주는 기기. 문제는 당시 한국에 정식 허가된 제품이 없었다는 점이다. '미라'는 직접 해외에서 이 기계를 구매하고, 공학 지식을 활용해 스마트폰과 연동되도록 개조한다.
덕분에 '동명'은 학교에 있어도 '미라'가 실시간으로 혈당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같은 처지의 환자 가족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미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기기를 대량 구매해 나눠주고, 납땜으로 직접 만든 연동 장치를 무료로 설치해줬다. 영리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아픈 아이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미라'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고발당한다. 혐의는 '무허가 의료기기 수입 및 제조'. 관세청, 식약처, 검찰 조사를 오가는 동안, 법은 '미라'를 범법자로 취급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제도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슈가>는 한국1형당뇨병환우회 김미영 대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김 대표의 아들은 2012년 3살 때 1형 당뇨 진단을 받았다. 그로부터 7~8년간 김 대표는 삼성전자 엔지이너 일도 그만두며, 연속혈당측정기 도입을 위해 싸웠으며, 고발당했고, 결국 제도를 바꿔냈다. 2018년 전후로 국내에 정식 CGM이 승인됐고, 2019년부터는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됐다. 영화는 이 긴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한다.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이 압축 과정에서 놓쳐버린 것들이 아쉽다.
실화를 영화로 만드는 건 재료를 요리하는 일이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다고 해서 그냥 식탁에 올려놓으면 요리가 되는 건 아니다. <슈가>는 재료는 훌륭한데, 조리법이 평범했다. 김미영 대표의 경험 자체가 워낙 강력했기에, 영화는 그것을 충실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부 장면에서는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민진웅이 연기한 남편 '준우'가 대표적이다. 아내가 환우들을 돕는 일에 대해 "왜 남의 일까지 나서느냐"며 반발하다가 갑자기 집을 나간다. 현실의 부부 갈등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영화는 왜 '준우'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캐릭터가 서사를 밀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느낌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오타니 쇼헤이의 '이도류'를 이야기하는 장면도 걸렸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014년경인데, 당시 오타니는 일본 프로야구 2년차였다. 한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그의 이도류가 화제가 되려면 적어도 2016년 이후는 되어야 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실화 기반 영화에서 이런 고증 오류는 몰입을 깨뜨린다.
그럼에도 <슈가>가 볼 만한 이유는 명확하다. <슈가>를 다른 질병 영화와 구분 짓는 건 감독의 정체성이다. 최신춘 감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1형 당뇨 진단을 받은 당사자다. 영화 속 '동명'이 화장실에 숨어 주사를 맞는 장면,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고 싶지만 망설이다 발걸음을 돌리는 장면은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1형 당뇨는 '소아 당뇨'로 불리기도 하지만, 식습관이나 비만과 무관한 자가면역질환이다. 그럼에도 "관리를 못 해서 걸린 병"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최신춘 감독은 자신이 1형 당뇨를 딛고 영화감독이 된 것처럼, '동명'도 야구를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로 그렸다. 영화 속 '동명'이 마운드에 다시 서는 장면은 신파적이지 않다. 오히려 담담하다. 이 담담함이 오히려 설득력을 만든다. 당사자가 만든 영화이기에 가능한 균형감이다.
제도가 환자를 보호하지 못할 때,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슈가>는 법을 어기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연속혈당측정기가 도입된 지금도 학교 내 인슐린 투약 환경은 여전히 공백이 많다. 법은 바뀌었지만, 아이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실화가 주는 가치가 뛰어나, 영화적 서사 구성의 아쉬움이 가려진다. 완성도 높은 영화는 아니지만,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영화다. ★★★
2026/01/23 CGV 신촌아트레온
※ 영화 리뷰
- 제목 : <슈가> (Sugar, 2026)
- 개봉일 : 2026. 01. 21.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06분
- 장르 : 드라마, 가족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최신춘
- 출연 : 최지우, 민진웅, 고동하, 김영성, 박철민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