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명의 감독이 3분으로 증명한 한국영화의 가능성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by 양미르 에디터
5023_5621_238.jpg 사진 = 영화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 CJ ENM

CJ ENM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30주년을 기념한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는 제목부터 절박하다. 한국 영화계가 유례없는 한파를 맞이한 지금, 30명의 감독이 각자 3분씩 만든 30편의 단편을 3막으로 엮어 극장에 내놓았다. 윤가은, 이종필, 김도영, 이경미, 정가영, 정재은 등 한예종을 거쳐 간 현역 감독부터 교수진, 재학생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창작자들이 "왜 영화를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한다.


1막 '예열'은 관객의 감각을 깨우는 섹션답게 경쾌하고 위트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김도영 감독의 <엎어질 조짐>은 6년째 같은 시나리오를 쓰는 감독(정유미)이 안경이 깨지고 코피가 나는 불길한 징조들을 겪으며 느끼는 불안을 그린다. 전작 <82년생 김지영>(2019년)에서 호흡을 맞춘 정유미는 여기서도 내면의 동요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김도영 감독은 "짧은 단편이 주는 자유로움에 행복했다"라고 밝혔는데, 그 자유로움이 제약 없는 실험으로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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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영 감독의 표제작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는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동료에게 "30번 생각해 봤어? 영화 찍다가 각혈하거나 맹장 터진 적 있어?"라며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붓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담았다. 영화를 완성하기까지의 고통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이 대사 하나하나에 배어난다. 발칙한 작품을 선보여 온 정가영 감독답게 자조와 애정 사이를 경쾌하게 오간다. 이종필 감독의 <꿩>은 화장실 30미터 앞에서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의 긴박한 대화를 3분 안에 압축했다.

오세연 감독의 <어느 날, 영화가 죽었습니다>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다. '오영화'라는 이름의 젊은 감독 장례식에서 그가 남긴 유언 영상이 재생된다. 유언이 끝없이 이어지자 슬퍼하던 친구들도 지루해하고, 결국 "영화는 말이 너무 많아. 근데 재미가 없어. 이러니까 아무도 영화를 보러 안 오지"라는 일갈이 나온다. 그 순간 관 뚜껑이 열리고 '오영화'는 눈을 뜬다. "영화, 관"이라는 언어유희를 통해 영화의 죽음과 극장의 소멸을 동시에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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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엽 감독의 <30번 환생한 남자>는 30번 환생했다고 주장하는 남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창작과 영화 매체에 대해 재치 있게 돌아본다. 이가희 감독의 <볼일이 있어>는 애매한 관계를 확실하게 하고 싶은 '복희'와 말 못 할 사정을 지닌 '완용' 사이의 오해가 쌓이며 꼬여가는 관계를 그린다. 남궁선 감독의 <우리가 죽기 전에>는 영화감독, 촬영감독, 파괴공학자가 각자 일의 유용성을 논하다 "좋은 영화가 사라진 시대"라며 영화 실종신고를 하러 가는 과정을 그린다. 남궁선 감독은 "제약 조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쏟아져나오는 화두와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는데, 이 작품에서 창작 환경에 대한 냉소와 애정이 충돌한다.

황슬기 감독의 <좋아!>는 좋아하는 대상에게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의 설렘을 그렸다. 임선애 감독의 <껌이지>는 꼬인 연애사로 머릿속이 복잡한 감독(전혜진)과 배우(기주봉)의 대화를 통해 연애와 영화에 대한 공통된 감정을 '껌'이라는 은유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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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만감이 교차한다>는 시나리오 속 한 줄 "만감이 교차한다"를 연기하기 위해 하루 종일 30테이크 넘게 촬영하는 배우(김수안)의 고군분투를 재치 있게 포착했다. 윤가은 감독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스케줄 속에서 허둥지둥하며 영화를 만드는 순수한 기쁨과 고통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라며, "영화 만드는 일은 참 기묘하고 즐거운, 대체 불가의 강력한 놀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윤 감독의 말처럼 이 작품은 영화 만들기의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드러낸다.

2막 '심연'은 사유와 관찰을 예술적 시선으로 담아낸 섹션이다. 정통 영화 문법부터 무성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까지 다양한 형식이 등장한다.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PARDIN>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2017년)로 독보적 시선을 보여준 그의 연장선에서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차성덕 감독의 <방문>은 고독사한 남자의 부고를 알리러 간 사회복지사 '영우'가 맞이하는 예상치 못한 순간을 통해 "여기가 좀 채워지는 기분"이 영화를 보고 만드는 기분이라는 것을 조용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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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감독의 <여름임장, 무성영화>는 여름 한 계절을 임장을 가꾸며 보내는 이모호와 박바그의 일상을 통해 기후위기를 은유적으로 담아냈다. 강미자 감독의 <30이라는 거..>는 '2025년이 지난 21세기,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무성영화 형식으로 표현했다. 박다빈 감독의 <서른을 구하라>는 숫자 30이 사라진 세계에서 삶의 의지를 잃은 '온다'가 남자 '서른'을 만나 잃어버린 서른 살의 행복한 기억을 되찾고 그를 구하러 나서는 이야기를 통해 잠시 잃어버렸던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오점균 감독의 <시간의 몸>은 수십억 년 동안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진화해 온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그림 영화라는 신선한 포맷으로 풀어냈다. 김경래 감독의 <조베이데>는 같은 작품을 보며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연인 사이를 꿈으로 대비되도록 표현해 색다른 여운을 안긴다. 명소희, 새훈 감독의 <너무 늦게 당신에게>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 위를 지나가는 우리 삶의 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생생히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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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헌 감독의 <소리없이 빙긋이>는 여름밤 러닝을 하던 배우 '진하'와 감독 '자연'의 우연한 짧은 만남을 통해 힘든 상황에도 새로운 희망을 마주하는 순간을 그렸다. 김형구 감독의 <TRICET, 서른>은 서른에 실직 후 무작정 타국으로 간 'J'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을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담아냈다. 2막은 속도를 낮추고 시선을 깊게 만들며, 고요하지만, 강한 잔향을 남기려 한다.

3막 '폭발'은 스릴러, 블랙코미디, 호러 등 장르적 쾌감을 전면에 내세운 섹션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감독진이 참여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박세영 감독의 <미소천사>는 한강 변에 똑같은 포즈로 앉아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연인들의 섬뜩한 풍경을 그렸다. <다섯 번째 흉추>로 신체 감각을 전면에 내세운 박세영 감독의 감각이 3분 안에 응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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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의 <바세린>은 병원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난 '희준'의 이야기를 위트 있게 풀어냈다. 이경미 감독은 "나는 죽어도 죽어도 이대로는 그만둘 수 없다"라며 영화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이자 한예종 명예교수인 김홍준 감독의 <담배를 주제로 한 세 개의 움직임과 열 번의 흔들림>은 옥상 세 사람과 담배, 30개의 쇼츠를 감각적으로 엮었다.

강다연 감독의 <30번째 관객>은 영화가 사라진 시대, 낡은 극장에서 평생 30번째 관객을 기다리다 백골이 된 여인을 그린다. 오인천 감독의 <후즈데어?>는 서른 번째 희생자를 노린 연쇄살인마가 평범한 집에 침입하며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그린 스릴러다. 전현지 감독의 <30초만 돌려봐>는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남자가 반복되는 시간의 왜곡 속에서 여자에게 닿지 못하는 과정을 그린다. OTT 시대 영화가 일상의 시간과 섞여 끊임없이 리와인드 되는 상황을 은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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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명 감독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투명해지는 능력을 얻은 남자의 시선을 통해 일상의 표면 아래 감춰진 욕망을 포착한다. 이정홍 감독의 <워크샵3>은 버려진 피아노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을 통해 창작의 집요함을 드러낸다. <괴인>(2023년)으로 신인감독상을 휩쓴 이정홍 감독의 날카로움이 3분 안에 압축됐다.

이요섭 감독의 <미래영화>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다. AI가 인간의 영화를 대체하는 시대, 챗GPT와 함께 미래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의 시도를 그린다. 프롬프트에 따라 다양한 장면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영화의 미래를 묻는다. 끝으로 신정우 감독의 <이중창>은 창문 밖 주차장 풍경에 목소리를 입혀 더빙하던 '현'이 살인사건과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살인범을 목격하며 벌어지는 기이한 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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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편의 작품을 연속해서 볼 때 느끼는 문제는 편차다. 30명의 감독이 각자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하나의 영화로 묶였을 때 일관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 어떤 작품은 완결된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를 갖췄지만, 어떤 작품은 아이디어의 스케치 수준에 머문다. 톤의 변화도 급격하다. 자조적 코미디에서 진지한 성찰로, 다시 형식 실험로 넘어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관객은 3분마다 다른 세계로 던져지며 적응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의 실험정신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극장 영화가 위축된 시대에 3분짜리 단편 30편을 극장에 걸었다는 것, 1막, 2막, 3막 각각 3,000원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 30명의 감독에게 자유로운 창작 공간을 제공했다는 것. 이 모든 시도는 의미가 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혼란스럽더라도,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극장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Project 30, 2026)
- 개봉일 : 2026. 02. 0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4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김도영, 정가영, 이종필, 오세연, 김태엽, 이가희, 남궁선, 황슬기, 임선애, 윤가은, 정윤석, 차성덕, 정재은, 강미자, 박다빈, 오점균, 김경래, 명소희/새훈, 강동헌, 김형구, 박세영, 이경미, 김홍준, 강다연, 오인천, 전현지, 조영명, 이정홍, 이요섭, 신정우
- 출연 : 정유미, 옥자연, 송희준, 김수안, 최성은 등
- 화면비율 : 1.85:1(기본/영화에 따라 다름)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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