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54] <왕과 사는 남자>
2013년 <관상>이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그렸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단종의 유배 생활을 다룬다. 시간적으로도, 배급사(쇼박스)도, 심지어 미술감독(배정윤)과 의상감독(심현섭)까지 겹치는 이 영화는 <관상>의 정신적 속편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속편이 가진 숙명이다. 전작의 성공 공식을 따라가되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줄타기. <왕과 사는 남자>는 이 줄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진 못한다.
영화는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 촌장 '엄흥도'(유해진)가 마을 부흥을 위해 유배지 유치 경쟁에 뛰어들면서 시작된다. 옆 마을 '노루골'이 유배 온 양반 덕분에 풍족해진 걸 목격한 '엄흥도'는 영월 군수 '어세겸'(박지환)를 찾아가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겠다고 자청한다. 지체 높은 양반이 오면 한양의 인맥이 찾아올 것이고, 아들 '태산'(김민)의 과거 급제도 도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유배자를 맞을 준비를 하던 '엄흥도' 앞에 나타난 건 고관대작이 아닌 16세 소년, 왕위에서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된 '이홍위'(박지훈)였다.
복권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자칫하면 역모에 연루될 수 있는 '뜨거운 감자'가 마을에 온 것이다. 식음을 전폐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이홍위'와 그를 감시해야 하는 보수주인 '엄흥도'. 둘 사이의 거리는 '이홍위'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엄흥도'가 그를 구하면서 좁혀지기 시작한다. '광천골' 사람들이 정성껏 차린 밥상, '태산'과 나누는 대화, 산에서 마주친 호랑이를 향해 쏜 화살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궁궐 밖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 '이홍위'는 서서히 생기를 되찾는다.
하지만 '한명회'(유지태)는 단종 복위를 꾀하는 '금성대군'(이준혁)을 이용해 '이홍위'를 궁지로 몰아넣고, '엄흥도'는 자신이 아끼게 된 '이홍위'를 지킬 것인가 마을을 지킬 것인가의 기로에 선다. 장항준 감독은 "실록에 남은 두 줄,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하고 시신을 수습한 뒤 평생 숨어 살았다'라는 기록에서 출발했다"라고 밝혔다.
왜 엄흥도는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에도 시신을 거뒀을까? 그 질문의 답을 장항준 감독은 '밥'에서 찾았다.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함께 밥 먹는 사람'을 뜻하듯, 영화는 밥상을 매개로 왕과 평민 사이의 위계를 허물어뜨린다. 설정 자체는 효과적이다. 조선시대에서 쌀밥은 경제적 여유의 표시였고, 누구와 밥상을 나누는가는 신분 관계를 드러내는 행위였다. 왕과 평민이 무릎을 맞대고 식사한다는 것 자체가 위계의 해체를 상징한다.
영화는 머리로 판단하는 이해관계는 공포 앞에서 무너지지만, 몸으로 축적된 일상의 기억은 쉽게 배신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 메시지가 2026년 관객에게 얼마나 참신하게 들릴까 하는 점이다. '정'과 '일상'을 매개로 한 관계의 서사는 한국 영화가 수십 년간 반복해 온 레퍼토리다.
<왕과 사는 남자>는 유해진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영화다. 초반 유배지 유치 경쟁을 설명하는 장면부터 그의 특유 말맛이 작동한다. 방대한 대사량을 리듬감 있게 풀어내며 관객을 1457년 강원도 산골로 끌어들이는 힘은 여전하다. 웃기다가도 순식간에 진지해지고, 경박해 보이다가도 어느새 비장해지는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이 영화의 톤을 결정한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터져 나오는 유해진의 눈물은 연출된 슬픔이 아니라 배우 본인이 캐릭터와 동화된 순간처럼 보인다.
박지훈이 연기한 단종은 역사책에 나오는 가엾은 소년 왕이 아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이홍위'가 '광천골' 사람들을 만나 조금씩 살아나는 과정을, 박지훈은 최소한의 대사로 표현한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는 순간들이 이 영화의 진짜 드라마다. '한명회' 앞에서 비로소 왕의 권위를 되찾는 장면에서 박지훈이 내뿜는 에너지는 유지태와의 체격 차이를 잊게 만든다. 두 배우가 맞서는 장면은 이 영화가 도달한 최고점이다.
유지태의 '한명회'는 우리가 기존 사극에서 봐왔던 인물과 결이 다르다. 비루하고 교활한 간신이 아니라, 육중한 체구에 냉혹한 합리성을 갖춘 실세로 그려진다. 유지태는 과도한 연기 없이 존재만으로 압박감을 만들어낸다. 그가 연기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하수인이 아니라 왕실 자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는 관료 출신 권력자다. 이 설정 덕분에 수양대군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도 권력 구도는 명확하게 전달된다.
한편, <왕과 사는 남자>가 <관상>의 후속편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구조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권력과 무관한 서민이 역사의 중심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결국 도덕적 선택 앞에서 용기를 낸다는 이야기. 송강호와 유해진이라는, 한국 영화에서 '평범한 사람의 비범함'을 가장 잘 구현하는 두 배우가 각각 중심을 잡는다는 점. 실존하는 역사적 악인(수양대군/한명회)을 전면에 배치하는 방식까지. <왕과 사는 남자>는 <관상>이 13년 전 깔아놓은 레일 위를 거의 그대로 달린다.
문제는 그 레일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초반의 과잉된 코믹 연출은 한국 코미디의 화석처럼 보이고, '광천골'의 순박한 주민들은 <웰컴 투 동막골>(2005년)을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을 준다. 긴장이 필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천둥소리와 번개, 그리고 위협을 시각화하기 위해 등장하는 호랑이 CG는 사극 드라마의 연출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코미디와 정치 스릴러라는 두 개의 다른 장르를 오가는데, 이 전환점들이 자연스럽지 않아 러닝타임 중반 이후 흐름이 자주 끊긴다.
그럼에도 <왕과 사는 남자>가 완전히 실패한 영화는 아니다. 배우들의 앙상블은 탄탄하고(전미도, 이준혁, 안재홍, 박지환 모두 제 몫을 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축적된 감정이 터지는 순간의 울림은 분명하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영화지만, 그 과정이 주는 감동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항준 감독은 "신분의 지위고하를 넘어 서로 소통했던 사람들, 진정성을 가지고 용기를 냈던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다시 만나며 함께 위안을 얻고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진심은 분명 스크린에 전해진다. ★★★
2026/01/21 메가박스 코엑스
※ 영화 리뷰
- 제목 : <왕과 사는 남자> (The King's Warden, 2026)
- 개봉일 : 2026. 02. 0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7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장항준
- 출연 :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김민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