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판 '아바타', 인간과 자연의 대결에서 느낀 점

[별세개반이상만 #84] <호퍼스>

by 양미르 에디터

※ 영화 <호퍼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을 그린 작품들에는 공통된 문법이 하나 있습니다. 불이 타오른다는 것인데요. <모노노케 히메>(1997년)와 <아바타>(2010년)에서 숲이 불탈 때, 그 불은 액션 장치가 아니라 인간 문명의 폭력성이 정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였죠. 픽사의 신작 <호퍼스>도 이 계보를 잇는데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산불이 일어날 때, 동물들은 스스로 댐을 무너뜨려 물을 내보냅니다. 파괴의 불길 앞에서 댐을 여는 쪽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이죠.

물이 인간의 도시를 구할 때, 영화는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가장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화란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불과 물이 교차하는 이 역설이 <호퍼스>의 본질입니다.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대학생 '메이블'(파이퍼 커다 목소리)은 고향 '비버턴'의 숲속 연못이 재선을 노리는 '제리' 시장(존 햄 목소리)의 고속도로 건설 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시민 서명 운동에 나서지만, 벽에 부딪히죠.

5118_5886_4712.jpg 사진 = 영화 '호퍼스'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연구실에서 생물학 교수 '샘'(캐시 나지미 목소리)이 사람의 의식을 동물 로봇에 이식하는 '호핑' 기술을 개발 중임을 목격하는데요. 교수의 만류를 뿌리치고 로봇 비버에 접속한 '메이블'은 동물 세계로 뛰어듭니다. 그곳에서 포유류의 왕 '조지'(바비 모니한 목소리)를 만나 '연못 법'을 배우고, 점차 동물들의 신임을 얻어 핵심 조력자로 자리 잡죠.

하지만 '메이블'의 열정은 예상치 못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데요. '메이블'이 '동물 의회'에서 호소한 말들이 뜻밖의 방향으로 불을 지피죠. '곤충 여왕'(메릴 스트립 목소리)의 아들 '타이터스'(데이브 프랑코 목소리)가 이끄는 급진파가 인간 섬멸을 선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지'와 함께 '타이터스'의 광기를 막으려는 '메이블'은 결국 자신이 지키려 했던 존재들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에 빠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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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스>가 <아바타>를 참조한다는 사실은 영화 스스로도 압니다. '메이블'이 호핑 기술을 처음 보고 "이거 <아바타> 아니냐"라고 묻자 '샘' 교수가 "'아바타' 아니거든!"이라며 발끈하는 장면은 제작진의 솔직한 자기 인식인데요. 그러나 <호퍼스>가 <아바타>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이종 세계에 침투한 주인공이 영웅이 되는 대신 의도치 않은 재앙의 방아쇠를 당긴다는 데 있죠.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나비족'보다 더 뛰어난 전사이자 구원자로 군림했다면, '메이블'은 선의로 행동하면서도 동물 사회를 교란하고 갈등을 증폭시키죠. <호퍼스>를 조금 더 파고들면 다양한 해석의 실마리들이 튀어나오는데요. 우선 '타이터스' 캐릭터입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변태가 이 영화에서는 성장이 아니라 급진화의 은유로 읽히죠. 가장 작고 연약한 존재가 가장 폭력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과정, 억압받은 자의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경고가 그 변태 과정에 겹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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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왕의 낙관주의에도 균열이 있는데요. "모두가 함께다"라는 그의 세계관은 따뜻하지만, 선의와 포용만으로는 구조적 폭력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씁쓸한 여운도 등장하죠. '호핑' 기술 자체의 양면성도 되새길 만합니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개입이자 침범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 지점은 AI 기술이 빠르게 자연과 생태계에 적용되는 현재의 맥락과도 묘하게 공명합니다.

끝으로 '메이블'의 성이 일본계 미국인 '타나카'라는 점도 흘려보내기엔 아깝죠. 주류 사회의 외부인이 자연과 약자의 편에 서서 싸우려다 오히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구도인데요. 이 설정은 이민자, 소수자가 어떤 공동체에 '진심으로' 속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오래된 질문과 겹쳐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호퍼스>가 이 모든 해석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고들수록 층위가 생기는 작품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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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호퍼스>는 픽사가 오리지널 작품이 연이어 고전하던 흐름에서 나온 작품인데요. <토이 스토리 5>라는 '절대적인 안전망'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먼저 내놓은 모험이기도 합니다. 그 모험의 성패를 굳이 가리자면, <호퍼스>는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편인데요. 픽사 전성기의 깊이에 닿지는 못하지만, 유쾌한 혼돈 속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죠. 불이 타오르고, 물이 덮고, 자연이 정화한다는 오래된 문법이 <호퍼스>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 문법을 둘러싼 캐릭터들이 충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

2026/03/04 CGV 왕십리


※ 영화 리뷰
- 제목 : <호퍼스> (Hoppers, 2026)
- 개봉일 : 2026. 03. 04.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04분
- 장르 : 코미디, 드라마
- 등급 : 전체 관람가
- 감독 : 다니엘 총
- 목소리 출연 : 파이퍼 커다, 바비 모니한, 존 햄, 메릴 스트립, 캐시 나지미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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