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83] <햄넷>
셰익스피어 같은 위인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질 때마다, 불가피하게 따라붙는 함정이 있습니다. 위인의 천재성을 설명하려는 충동인데요. 클로이 자오 감독의 <햄넷>은 그 함정을 처음부터 무시합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으로 거의 불리지 않죠. 그냥 '윌'인데요.
<햄넷>은 16세기 말 잉글랜드 스트랫퍼드를 배경으로 하죠. 교사 '윌'(폴 메스칼)은 어느날 '아녜스'(제시 버클리)를 발견합니다. '아녜스'는 마을 사람들이 '숲속 마녀의 딸'이라 부르는 여자인데요. 매를 키우고, 약초를 캐고, 나무와 교감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빠르고 불가항력적인데요. 가족들의 반대에도 그들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큰딸 '수잔나'(보디 레이 브레스낙)와 쌍둥이 '햄넷'(자코비 주프), '주디스'(올리비아 라인스)를 낳습니다.
'윌'은 런던을 오가며 극작가로의 꿈을 쫓고, '아녜스'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죠. 소박하지만 실하게 쌓아온 일상이었는데요. 그 일상에 균열이 들어오는 건, 어느 날 '주디스'가 역병에 걸리면서부터입니다. '아녜스'는 필사적으로 딸을 살리려 하지만, 죽음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손을 뻗죠. 쌍둥이 '햄넷'이 열한 살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아녜스'라는 인물의 핵심에는 아이러니가 있는데요. 예지력을 가진 자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력하다는 역설은 '아녜스'의 비탄을 단순한 슬픔이 아닌 자기 붕괴로 만들죠. 내가 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이것만은 보지 못했는가. 제시 버클리는 이 균열을 표정의 층위에서 다룹니다. 울부짖는 장면보다, 울음이 멈추고 난 후의 공백이 더 무겁게 남는 이유죠.
'윌'에 대한 감정도 그만큼 복잡하게 쌓여 있는데요. '아녜스'는 남편을 런던으로 보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압니다. 그가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아들이 죽던 날 아버지는 런던에 있었습니다. 이 사실 하나가 이후의 모든 관계를 뒤틀어 놓죠. 사랑과 원망이 같은 자리에 존재하는 감정. 제시 버클리는 그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윌'이 돌아와 안으려 할 때 그를 밀어내는 장면에서, '아녜스'의 몸은 거부하면서도 어딘가 붙잡고 싶어 하죠. 그 모순을 제시 버클리는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폴 메스칼은 위대한 문인을 연기하는 데 신화화를 거부했는데요. 그는 "셰익스피어는 수백 년간 신격화됐지만,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그 안에 복잡한 충동과 욕망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특히 독백을 파고들며 인물의 뿌리를 찾으려 했는데요. 그 결과 폴 메스칼의 '윌'은 천재라기보다 자기 감정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 한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슬픔 앞에서 도망치듯 글에 몰두하는, 그래서 '아녜스'에게 더 원망스러운 남자 말입니다.
한편, 클로이 자오 감독은 <햄넷>을 전기 영화가 아닌 감정의 다큐멘터리로 접근했는데요. 촬영감독 우카시 잘의 카메라는 특이하게도 자주 고정됩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CCTV 샷'이라 부르는 이 기법은 우카시 잘 촬영감독의 전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년)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인물들을 따라가는 대신, 카메라는 멈춰서 지켜보죠. 그 침묵의 시선은 영화에 묘한 거리감을 만드는데요. 관객은 능동적 관찰자가 아닌, 우연히 이 가족의 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게 된 존재가 됩니다. 그 거리가 오히려 감정을 더 깊이 파고들죠.
셰익스피어의 삶을 다룬 영화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인데요. <햄넷>은 그 의무를 다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죠. 이 영화는 예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살아남은 자를 위한 언어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작은 천재의 산물이 아니라, 두 부모가 아들의 빈자리를 견디며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낸 흔적에서 왔다고 이 영화는 주장하죠.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건 논리 때문이 아니라, 제시 버클리의 마지막 얼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사랑은 죽지 않는다. 형태가 달라질 뿐"이라고 말한 '명제'가 그 얼굴 위에 새겨진 것이죠. ★★★★☆2026/02/25 메가박스 군자
※ 영화 리뷰
- 제목 : <햄넷> (Hamnet, 2025)
- 개봉일 : 2026. 02. 25.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26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클로이 자오
- 출연 : 제시 버클리, 폴 메스칼, 에밀리 왓슨, 조 알윈, 보디 레이 브레스낙 등
- 화면비율 : 1.78: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