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82] <센티멘탈 밸류>
오슬로 국립극장의 무대 뒤편. 공연을 앞둔 연극배우 '노라'(레나테 레인스베)가 코르셋을 입은 채 극심한 공황 발작을 일으킵니다. 스태프들이 진정을 시키고, 동료 배우에게 자신을 때려달라고 애원하며, 코르셋을 직접 찢어버리려는 혼돈 끝에 '노라'는 간신히 무대에 오르죠. 그리고 관객을 압도하는데요. 무대 위에서는 빛나고, 무대 밖에서는 무너지는 사람이 바로 '노라'죠.
그 무렵 '노라'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추도식이 열린 오슬로의 가족 주택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죠. 15년간 영화를 한 편도 만들지 않았던 전설적 영화감독 '구스타프 보르그'(스텔란 스카스가드)인데요. 이혼 후 두 딸과 사실상 연락을 끊고 살아온 그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들어옵니다. 역사학자인 둘째 딸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는 남편, 아들과 함께 안정된 삶을 꾸리고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아버지를 대하죠. 반면 '노라'는 그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구스타프'는 '노라'에게 신작 영화의 주연을 제안하는데요. 나치 점령기 오슬로에서 반나치 활동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석방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신의 어머니 '카린'을 모티브로 한 자전적 각본이죠. '노라'는 대본조차 펼쳐보지 않고 거절합니다. '구스타프'는 한 영화제 회고전에서 할리우드 스타 '레이첼 켐프'(엘 패닝)를 만나고, 같은 역할을 제안하는데요. 예술적 갈증을 느끼던 '레이첼'은 이를 받아들이고 오슬로로 건너오죠.
촬영지는 다름 아닌 '보르그' 가족의 집으로, '노라'와 '아그네스'가 자란 그 공간입니다. '구스타프'는 '아그네스'의 아들 '에리크'(외위빈 헤스예달 로벤)에게도 영화 출연을 제안하고, '아그네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일이 아들에게 반복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부전여전, 모전자전.' <센티멘탈 밸류>를 보고 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었는데요. 그런데 이 표현이 겨냥하는 관계는 하나가 아닙니다. '구스타프'에서 '노라'로 내려오는 선도 있지만, '아그네스'를 거쳐 아들 '에리크'로 이어지는 선이 따로 존재하죠. '구스타프'는 어린 시절 '아그네스'를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켰고, 이제 그 아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합니다. 역할을 맡기려는 아버지,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 자녀로 패턴은 대물림되죠. 피는 흐르고, 실수도 흐릅니다.
'구스타프'와 '노라'의 선은 또 다른 방식으로 겹치는데요. 두 사람은 예술가적 기질도, 감정을 언어 대신 예술로만 꺼내는 방식도 판박이처럼 닮았습니다. 레나테 레인스베는 이 관계에 대해 "'노라'는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것에 분노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과 아버지가 놀라울 만큼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인데, 소통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는데요. '구스타프'가 딸에게 각본을 건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대화 대신 예술을 택하는 방식이죠. '노라' 역시 무대 위에서만 자신의 감정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인데요. 같은 대화의 언어를 쓰면서도 끝내 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아이러니가 영화의 핵심 긴장을 만듭니다.
'레이첼'이 '노라'의 자리를 채우려 할수록, 그 자리가 얼마나 특수한 것인지가 역설적으로 드러나는데요. '레이첼'이 결국 역할에 온전히 닿지 못하는 이유는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죠. 그 역할은 살아낸 사람이 아니면 연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요. 영화는 '레이첼'이 영어로 리허설하는 장면과 '노라'가 노르웨이어로 같은 대사를 발화하는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두 연기 모두 강렬하지만, 그 울림의 결은 다르죠.
<센티멘탈 밸류>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집입니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에스킬 보그트와 대본을 쓰던 시기에 가족이 대대로 물려받아 온 집이 매물로 나온 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고 밝혔는데요. 제작진은 현재 시점 장면을 트리에 감독의 이전 작품 <오슬로, 8월 31일>(2011년) 촬영지로 사용했던 실제 집에서 찍었고, 1918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플래시백을 위해 스튜디오에 1~2층 전체를 재현했습니다.
이 집은 '노라'가 어린 시절 학교 과제로 쓴 에세이에서 이미 의인화된 존재로 등장하는데요. 집의 입장에서 가족의 역사를 서술하는 그 에세이가 영화 전체의 내레이션 구조로 이어지죠. '카린'이 저항군 시절 상층 난방 파이프에 귀를 대고 아래층 독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하던 공간이, 수십 년 후 어린 '노라'가 같은 자리에서 부모의 싸움을 엿듣는 공간이 됩니다. 집은 설명하지 않죠. 그냥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편, 작품의 마지막 시퀀스는 롱테이크인데요. '구스타프'의 촬영 현장에서 '노라'가 연기를 마치고, 부녀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죠.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언어로 꺼낼 줄 모르는 사람들인데요. '구스타프'는 평생 대화 대신 카메라를 들었고, '노라'는 무대 위에서만 자신의 감정을 허락해 왔죠. 그러니 이 침묵은 회피가 아닙니다. 말 대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표현이죠.
'노라'는 끝내 아버지의 각본을 연기했는데요. 아버지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각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는 딸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죠. 그냥 써놓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닿은 것은 말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였는데요. 그것이 이 가족이 소통하는 방식이고, 어쩌면 그것만이 가능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전여전, 모전자전.' 피는 흐르죠. 그리고 때로는, 그 흐름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달라집니다. ★★★★★
2025/09/19 CGV 센텀시티
-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센티멘탈 밸류> (Sentimental Value, 2025)
- 개봉일 : 2026. 02. 18.
- 제작국 : 노르웨이
- 러닝타임 : 134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요아킴 트리에
- 출연 : 레나테 레인스베, 스텔란 스카스가드, 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엘 패닝, 앤더스 다니엘슨 리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