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교실에서 시작된 균열, 칼날 하나로 충분했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60] <차임>

by 양미르 에디터
5126_5919_246.jpg 사진 = 영화 '차임' ⓒ (주)디오시네마

구로사와 기요시는 관객을 놀라게 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감독이다. 천장에서 귀신이 떨어지거나, 음악이 갑자기 커지거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식의 공포는 그의 문법에 없다. 그가 즐겨 쓰는 도구는 훨씬 조용한 것들이다. 빛의 방향, 배우의 눈빛,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롱테이크. 45분짜리 중편 영화, <차임>은 그 방법론의 정수이자,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이름이 하나의 장르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차임>은 요리 교실에서 시작된다. 강사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츠오)는 수강생들에게 능숙하게 레시피를 지도하는 중년 남성이다.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지만, 현실의 그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 갇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강생 '타시로'(코히나타 세이이치)가 이상한 말을 꺼낸다. 귀에서 차임벨 소리가 들린다고, 그 소리가 자신을 조종하는 기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마츠오카'는 대수롭지 않게 수업을 이어가려 하지만, '타시로'는 끝내 충격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교실에 경찰까지 출동하는 소동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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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마츠오카'의 일상은 표면적으로 계속된다. 셰프 자리를 위한 면접을 준비하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를 마친다. 그러나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 아내는 혼자 빈 캔을 분리수거하며 이상한 기쁨을 느끼고, 아들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서로 같은 식탁에 앉아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존재할 뿐, 진짜 대화는 없다. 이윽고 새 수강생 '히시다'(아마노 하나)가 등장하면서 요리 교실엔 또 다른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마츠오카'의 내부에서도 무언가가 조금씩 반응을 한다. 결국,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는 바가 스트레이트하게 나온 드문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차임>은 감독의 자의식이나 장르적 완성도 같은 외적 목표보다, 순수하게 자신이 보는 세계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처럼 느껴진다. 일본의 미디어 플랫폼 로드스테드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도 좋다"라는 전폭적인 지지 속에 탄생한 작품인 만큼, 상업적 계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 결과물은 무척 단호하다. 설명하지 않는다. 해결하지 않는다. 이유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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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교실이라는 공간 선택은 탁월하다. 잘 정돈된 조리대, 반짝이는 칼날, 정확한 계량과 순서가 지배하는 이 공간은 현대 사회의 질서를 압축한 미니어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바로 그 질서정연함을 공포의 토대로 삼는다. 가장 위생적이어야 할 공간이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는 순간, 영화는 말없이 웃는다. 촬영감독 후루야 코이치는 실내의 금속 질감과 차가운 빛을 살려 공간 자체가 이미 위험 신호를 발산하도록 설계했고, 사운드 디자인은 침묵과 돌발적인 소음을 교차시키며 관객의 신경을 끊임없이 건드린다.

주인공을 맡은 요시오카 무츠오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작품에 여러 차례 출연했지만 주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연기는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무표정한 얼굴, 건조한 말투, 감정의 파동이 없는 일상적 제스처. 그 무감각한 껍데기가 서서히 벗겨지며 내면의 균열이 스며 나오는 과정을 그는 과장 없이 연기한다. '타시로' 역의 코히나타 세이이치는 짧은 등장만으로도 영화의 공기를 뒤바꾸어 놓는다. 일본 명배우 코히나타 후미요의 장남이기도 한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읽히지 않는 얼굴로 교실의 온도를 단번에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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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임벨 소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모티프다. 처음엔 '타시로'만 듣는 소리처럼 보이지만, '마츠오카' 역시 결국 그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설정은 중요하다. 만약 차임벨 소리가 '타시로'만의 환청이었다면, 관객은 "저 사람이 정신이 나간 것"이라는 안전한 해석으로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그 도망로를 막아선다. 소리는 특정 개인의 병리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무언가다. 알고리즘에 노출되고, 공동체 대신 각자의 화면 속에서 살아가며, 타인을 수단으로 소비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 소리의 잠재적 수신자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서늘한 지점이다.

<차임>이 45분이라는 러닝타임을 택한 것은 약점이자 선택이다. 세계관을 더 깊이 구축하거나 '마츠오카'의 내면을 더 섬세하게 탐색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그 여백을 공백이 아니라 긴장감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모호하게 맺어진 결말이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오래 따라붙는다. 점프 스케어 한 번 없이도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 영화 리뷰
- 제목 : <차임> (Chime, 2024)
- 개봉일 : 2026. 03. 04.
- 제작국 : 일본
- 러닝타임 : 45분
- 장르 : 스릴러, 공포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구로사와 기요시
- 출연 : 요시오카 무츠오, 코히나타 세이이치, 아마노 하나, 야스미 준페이, 세키 코지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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