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90] <마지막 야구 경기>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곧 철거될 야구장 '솔저스 필드'에 두 팀이 모입니다. '리버독스'와 '애들러스 페인트'. 팀 이름부터 어딘가 촌스럽고 정겨운데요. 선수들은 저마다 다른 나이와 배경을 가졌지만, 매주 일요일이면 이곳에 모여 경기를 이어온 사람들이죠. 이제 야구장은 중학교 건설 부지로 선정됐고,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비장한 결의가 있을 법도 하지만 영화는 그런 감정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죠. 선수들은 체념한 듯,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경기를 시작합니다.
경기는 예상대로 순탄하지 않죠. 팀당 9명을 채워야 몰수패를 면하는데, 와야 할 선수가 나타나지 않는데요. 아이를 재우러 갔다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선수, 산책하다 뒤늦게 복귀하는 선수, 깜빡했던 가족 행사에 부랴부랴 자리를 뜨는 선수. 사회인 야구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풍경입니다. 심판은 계약 시간이 지났다며 칼같이 퇴근하고, 기록원 겸 오랜 관중이 급조된 심판으로 투입되죠.
보호 장비도 없이 멀찍이서 어림잡아 볼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해도 선수들은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해가 저물자, 이번엔 조명이 문제인데요. 야구장에 조명 시설이 없는 것이죠. 잠시 머리를 맞댄 선수들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켜 내야를 밝히고 경기를 이어갑니다.
<마지막 야구 경기>를 연출한 카슨 룬드 감독은 야구를 "특정한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의식"으로 바라봤다고 밝혔는데요. "그 안에서만 만들어지는 유대감과 정체성이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승패에 관심이 없죠. 카메라는 그라운드 위의 플레이보다 더그아웃의 수다와 농담, 경기 사이사이의 침묵에 더 오래 머뭅니다. 타자를 흔들기 위해 상대 팀 전체가 이탈리아 음식 이름을 외치는 장면이나, 맥주를 마실수록 구위가 살아나는 투수의 설정은 실소를 자아내죠.
그러면서도 영화는 이따금 사회인 야구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순간들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카슨 룬드 감독이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년)에서 영감받았다고 직접 밝힌 맥락이 여기서 감지되죠. 폐관을 앞둔 극장의 마지막 상영을 담은 그 영화처럼, <마지막 야구 경기>도 사라질 공간을 배경으로 그 안에 깃든 시간의 결을 포착하려 합니다.
카슨 룬드 감독은 "야구는 정해진 시간이 없는 스포츠"라고 언급했는데요. 9회까지 끝내지 못하면 경기는 끝나지 않죠. 이 구조가 영화 전체의 리듬을 결정합니다. 경기는 밤까지 이어지고, 선수들 스스로도 왜 계속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죠. 그러나 아무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는데요.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공을 쫓는 모습은, 지나가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처절함이자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끝까지 해내려는 헌신입니다.
한국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 어렴풋이 다른 풍경들을 떠올릴지도 모르죠. 먼저, 동대문 운동장인데요. 수십 년간 수많은 스포츠 경기와 장터의 무대가 되었던 그곳이 철거되고 DDP가 들어섰을 때, 많은 사람이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죠. 그 공간에서만 가능했던 관계와 기억이 함께 사라진다는 감각이 있었는데요.
올해 시즌을 끝으로 철거되는 잠실 야구장은 사정이 조금 다르죠. 그 자리에는 돔구장이 들어서니, 야구장이 야구장으로 돌아오는 셈이니 완전한 소멸은 아닙니다. 그러나 40년 이상 쌓인 구장 특유의 공기, 그 안에서 형성된 기억의 결은 새 돔구장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대로 옮겨지지 않죠. '솔저스 필드'의 선수들이 더 좋은 시설의 다른 구장 대신 굳이 이곳을 고집한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겁니다.
<마지막 야구 경기>는 그 기록되지 않는 것들의 편에 서 있는데요. 영화는 작별을 요란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그 조용함이 오래 남죠.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승자도 패자도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사라져가는 공간과 그 안에서 쌓인 시간을, 그리고 그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정서를 담담하게 쌓아가죠. 야구를 모르는 관객에게도 이 영화가 건네는 질문은 낯설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어떤 공간, 어떤 시간, 어떤 관계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
2025/05/06 CGV 전주고사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마지막 야구 경기> (Eephus, 2024)
- 개봉일 : 2026. 04. 22.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99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카슨 룬드
- 출연 : 프레드릭 와이즈먼, 빌 리키스, 키스 윌리엄 리처드, 웨인 다이아몬드, 클리프 블레이크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