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음파 그래프만 남긴 감독의 선택

[별세개반이상만 #89] <힌드의 목소리>

by 양미르 에디터

2024년 1월 29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텔 알 하와 지역에 이스라엘군의 대피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힌드 라잡은 삼촌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는데요. 차량은 얼마 가지 못해 탱크의 포격을 받았죠. 오후 1시경, 열다섯 살 사촌 언니 라얀이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에 긴급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를 쏘고 있다"는 내용과 총성이 들리고,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겼죠. 적신월사가 다시 연락했을 때 수화기를 든 건 여섯 살 힌드였습니다. "너무 무서워요. 구하러 오고 있죠?" 차 안에는 죽은 가족들의 시신이 있었고, 탱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죠.

오후 5시 40분, 적신월사는 이스라엘 국방부 소속으로 팔레스타인 민사 업무를 담당하는 코가트(COGAT)와 조율을 마치고 구급차를 출동시켰는데요. 힌드가 있는 곳에서 8분 거리였죠. 오후 6시, 구급차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곧이어 힌드와의 통화도 두절됐죠. 힌드와 구급대원 유세프 자이노, 아메드 마드훈은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요. 차량에서 총탄 355발이 나왔습니다.

5221_6184_2946.jpg 사진 = 영화 '힌드의 목소리' ⓒ (주)더콘텐츠온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70분간의 실제 통화 기록을 영화 <힌드의 목소리>의 중심축으로 잡았는데요. 여기까지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했는지는 설명보다 경험으로 먼저 닿죠. 벤 하니야 감독이 '힌드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짧은 음성 클립을 통해서였는데요. 이후 팔레스타인 적신월사를 통해 70분 분량의 전체 녹음에 접근한 감독은 기다림과 공포와 끝까지 버티려는 시간이 담긴 그 기록 앞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힌드의 어머니 위삼에게 연락했죠. "어머니가 반대한다면 곧바로 물러날 것이었다. 그 대화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었고, 모든 것의 토대였다"라고 감독은 이야기했는데요. 위삼은 동의했고, 가족 전원이 지지했습니다. 전작 <올파의 딸들>(2023년)에서 벤 하니야 감독은 실종된 딸들의 역할을 배우들에게 맡겨 실제 가족의 트라우마를 재구성했는데요. 극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기억과 증언이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지를 탐색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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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드의 목소리>는 그 방법론을 한층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배우들이 적신월사 직원들을 연기하지만, 힌드와 라얀의 목소리는 2024년 1월 29일 그날의 것이었죠. 재연된 것과 실재한 것이 같은 공간에 놓입니다. 힌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화면에는 음파 그래프와 파일명 '240129.WAV'만 표시되죠. 어떤 시각적 재현도, 어떤 상상된 이미지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 선택은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을 함부로 형상화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언이자, 목소리 자체가 지닌 증언의 힘을 극대화하는 연출인데요.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들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보다 더 깊이 새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신월사 긴급 콜센터는 유리 칸막이와 데스크탑 컴퓨터, 헤드셋이 놓인 평범한 사무실인데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공간이죠. 그 공간에서 영화는 극한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조작하지 않습니다. '힌드의 목소리'가 흐를 때 어떤 극적 음악도 깔리지 않죠. 재연된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과잉을 피하는데요. 형광등 불빛 아래 지친 얼굴들, 떨리는 손, 흐트러진 머리카락. 배우들은 절제된 연기로 실제 직원들이 겪었을 무력감을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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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사자 킬라니)는 퇴근하려다 힌드의 전화를 받고 자리를 지키죠. '라나'가 힌드에게 쿠란 기도문을 읊어주는 장면에서, 무력감은 가장 인간적인 형태로 드러납니다. 기도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기도는 연결의 마지막 언어가 되죠. '오마르'(모타즈 말히스)는 "지금 당장 구급차를 보내야 한다"라며 상사 '마흐디'(아메르 흘레헬)와 충돌합니다. '마흐디'는 이미 수많은 동료를 잃었는데요. 유리벽에 마커로 조정 절차를 써 내려가는 그의 손은, 조직의 논리와 인간의 감각 사이에서 매일 찢기는 사람의 손이죠.

<힌드의 목소리>는 관객에게 행동을 요구하거나 분노를 촉구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목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목소리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90분 동안 함께 앉아서 듣게 만드는 영화죠.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이 전부인데요. 그 무게를 오래 품고 나오는 것. 그것이 <힌드의 목소리>가 관객에게 건네는 유일한 요청입니다. ★★★☆

2025/11/28 CGV 압구정
-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S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힌드의 목소리> (The Voice of Hind Rajab, 2025)
- 개봉일 : 2026. 04. 15.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89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카우타르 벤 하니야
- 출연 : 사자 킬라니, 모타즈 말히스, 아메르 흐헬, 클라라 코우리, 네스밧 세르한 등
- 화면비율 : 2.39: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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