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세상을 먼저 알아버리는 잔인한 여름

[별세개반이상만 #91] <르누아르>

by 양미르 에디터

<르누아르>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소마이 신지였습니다. <이사>(1993년)에서 이혼을 앞둔 부모 사이에 놓인 소녀가 혼자 세상을 감당하던 방식, <여름정원>(1994년)에서 아이들이 노인의 죽음 곁에 머물며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채 무언가를 알아버리던 그 감각. 하야카와 치에 감독이 소마이 신지 감독을 의식했는지는 모르죠. 그러나 <르누아르>는 소마이 신지가 오래전 열어놓은 어떤 문을 다시 두드리는 영화처럼 보입니다.

1980년대 일본 어느 지방 도시의 여름 방학. 11살 '후키'(스즈키 유이)는 말기암 판정을 받은 아빠 '케이지'(릴리 프랭키)와 그를 간병하며 직장을 병행하는 엄마 '우타코'(이시다 히카리) 사이에서 여름을 보내는데요. '케이지'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우타코'는 지쳐 있으며, '후키'는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죠. 작문 시간에 꿈속 자신의 장례식 풍경이나, 고아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쓰는데요. 담임이 '우타코'를 학교로 부른 건 그 때문인데, '우타코'는 딸의 글보다 자신이 직장을 비웠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쏠려 있죠.

5253_6269_5239.jpg 사진 = 영화 '르누아르' ⓒ 메가박스중앙(주)

한편, '후키'는 그 시간 집에서 1980년대 TV를 가득 채우던 초능력, 텔레파시 프로그램에 빠져 있는데요.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초자연에 손을 뻗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죠. 이처럼 '후키'의 여름은 탐구로 채워집니다. 영어 교실에서 사귄 친구네 집에서 그 집 아버지의 외도를 우연히 목격하고, 베란다에 멍하니 기대어 있던 이웃(카와이 유미)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하죠. 폰팅 광고를 본 후 겁 없이 전화를 걸었다가 그루밍을 일삼는 낯선 남자와 위험한 접촉을 하기도 합니다.


이 에피소드들은 이른바 성장 서사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데요. 교훈이 없고, 극적인 전환도 없습니다. '후키'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죠. '후키'가 어떤 기분인지는 '후키' 자신만이 압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보통의 성장 서사와 갈라지는 지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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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데요. 첫 번째 장편 <플랜 75>(2022년)는 75세 이상 노인에게 국가가 안락사를 권하는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죽음이 제도화된 사회를 날카롭게 비춘 작품이죠. <르누아르>가 노년의 죽음을 다룬 전작과 정반대로 11살 아이의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감독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얼마나 다양한 각도에서 탐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르누아르>의 초고를 2020년 12월에 썼는데요. <플랜 75> 촬영이 결정되기도 전,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춰 있던 시기였죠. 감독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암 투병을 지켜봤고, 병원을 드나들던 그 나날의 감각이 수십 년간 마음에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완전한 허구지만, 감각만큼은 자전적이죠. "일어나고 있는 일을 언어화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는 느끼는 일이 있었기에, 그때의 감각을 생생하게 세세히 드러내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라는 감독이 찍은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감각입니다. 죽음 앞에 선 아이가 언어 없이 느끼는 것들인 무덤덤함, 호기심, 외로움, 그리고 어딘가 이상하게 들떠 있는 기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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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스즈키 유이입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을 시작했으나, 첫 주자로 들어온 스즈키 유이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운명이란 걸 알았다"라고 했는데요. 당시 11살이던 스즈키 유이는 특기로 말 소리 흉내를 선보였고, 감독은 이후 시나리오 전체를 스즈키 유이에 맞춰 수정했죠. 말 울음소리를 따라 하는 장면, 경마장에서 아빠와 나란히 앉는 장면, 마지막에 백마가 등장하는 판타지 시퀀스 등이 캐스팅 이후 생겨난 장면들입니다. 감독이 배우를 찾으면서 동시에 영화를 발견한 경우죠. 참고로, 후반부의 그루밍 장면에서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도입해 스즈키 유이와 상대 배우 반도 료타 모두를 심리적으로 케어했다고 합니다.

스즈키 유이의 연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표정의 밀도인데요. '후키'는 잘 울지 않죠. 일례로, 장례식 이야기를 영어 선생님에게 무심코 꺼내는 장면을 보면, 선생님이 흐느끼는 동안 '후키'의 얼굴은 다른 곳을 향합니다. 여기서 소마이 신지의 계보가 떠오르죠. 소마이 신지의 아이들도 어른의 언어로 설명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몸으로, 행동으로, 침묵으로 드러냈죠. 하야카와 감독의 '후키'도 그렇습니다. 위기가 지나간 자리에서 '후키'는 무너지거나 교훈을 얻는 대신 엉뚱한 데로 주의를 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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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의 제목은 왜 <르누아르>였을까요? 1980년대 일본에서는 인상파 그림이 유행했고, "르누아르를 당신의 가정에"라는 식의 광고가 넘쳤다고 합니다. 서양을 동경하고, 가짜를 걸어놓고도 만족하는 정신. 거품경제의 들뜸과 공허함, 그리고 그 안에서 자라는 아이. 감독은 그 시대의 공기를 제목 하나에 밀어 넣었다고 밝혔죠. 그렇게 <르누아르>는 아이가 세상을 먼저 알아버리는 잔인한 여름의 감각을 오래 남기는 영화입니다. ★★★☆

2026/04/22 메가박스 군자


※ 영화 리뷰
- 제목 : <르누아르> (Renoir, 2025)
- 개봉일 : 2026. 04. 22.
- 제작국 : 일본, 프랑스
- 러닝타임 : 120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하야카와 치에
- 출연 : 스즈키 유이, 이시다 히카리, 릴리 프랭키, 카와이 유이, 나카지마 아유무 등
- 화면비율 : 1.66: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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