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생각에 대하여
스미냑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선셋 산책을 나갔다. 스미냑 비치의 선셋은 역시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생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와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아침부터 혼자 썬베드에 앉아 책 펴놓고 본격적으로 책 읽(지..않)기, 혼자 풀에서 수영하고 놀기, 풀 바에서 맥주 시켜놓고 분위기만 즐기기, 잠 오면 자기, 순간의 생각 끄적이기.. 해 지면 외출하기, 혼자 저녁 먹기, 괜히 맥주 시키기.. 등.
낯설고 재미있다.
시간에 얽매여 살았던 지난 세월들이 만들어 준 보상이라 생각하니 당당히 누려도 될 것 같다.
학교에 있을 땐 1교시, 2교시, 점심시간, 5교시, 6교시.. 등 수업시간으로 시간이 계산되어 방학 때면 '어, 어쩐지 배 고프더라, 4교시네..' 이런 셈을 했었는데 이 습관도 개학 없는 방학 같은 생활이 시작되니 한 달도 못 가 희미해지고 사라졌다.
이번 여행의 컨셉트인 '생각하는 여행'은 제2의 인생, 인생 2막,.. 이런 거창하고 무거운 이름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는 여행이 아니다. 나를 더 생각(think)해보는 여행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생각(consider) 해 보는 것, 그리고 나를 더 생각(care)해주기 등 '생각'의 다양한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명퇴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건지에 대한 계획을 물어보는 이들이 많다. 시간을 어떻게 보낼 건지에 대한 계획은 애써 하지 않을 생각(decide)이다. 자유로운 시간 속에 나를 흠뻑 젖게 해 봐야지.
태어나 자라고 어른이 되고 늙어가면서 인간은 생애토록 계획을 하며 살지만 죽음은 계획할 수 없다. 정작 계획대로 살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계획하려 한다. 습관처럼.
계획이라도 있어야 마음이 좀 편해지는 기분 때문일까?
이젠 계획 속에 움직이지 않고 그냥 하루를 기분 좋게 살 생각(will)이다.
기분 좋은 하루가 모여 어제가 되고 오늘이 되고 내일도 될 거란 생각(opinion)이다.
스미냑 쪽 호텔로 옮겨 온 첫날은 멘붕이었다.
체크인하다 흘끗 본 수영장은 노천탕인가 할 정도로 너무 작았다. 체크인을 도와주는 직원들이 과하게 친절해서 얼굴에 실망스러운 표조차 낼 수 없었다. 룸은 내겐 전혀 어필되지 않는 디테일의 예쁜 방이었다. 부티크 호텔을 표방하는 것 같긴 한데 단차 있는 플로어의 스윙체어와 좌식 소파가 공간을 좁게 만들어 답답했다. 게다가 여기저기 할로겐 조명들 때문에 머리 위가 뜨거웠다.
'샤워하면 좀 시원해지겠지..'
샤워를 끝내고 나왔는데 할로겐 조명이 실내를 더 달구어 놓았다. 몸은 땀으로 다시 얼룩졌다.
‘여기서 4박을 어떻게 지낸담.. ’
앞이 깜깜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로비로 돌진했다.
”저기.. 당신 이름이 뭐죠? 오, 쌔라.. 쌔라~ 내 방이 너무 더워요. 에어컨이 정말 하나도 시원하지 않아요.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해피하지 않아요. 4박 예약을 했지만 1박만 하고 싶은데 취소 수수료 없이 가능할까요? “
부킹닷컴 평점 9.7점이기에 후기를 믿고 예약했는데 젊은 커플에겐 예쁜 숙소일 수 있는 이곳은 나 같은 중년 아줌마에겐 그저 투머치 디테일의 좁고 답답한 숙소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에어컨은 소음 심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직원을 시켜 에어컨을 점검한 Sara는 에어컨이 고장 난 것 같다고 미안해하며 방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업그레이드해서 스위트룸으로 준 건데 원래대로 디럭스룸으로 가겠느냐며 엄청 안타까워했다.
“에어컨만 시원하게 나온다면 상관없어. 난 혼자 왔잖니. 로맨틱한 방은 다른 손님에게 주면 돼. ”
디럭스룸에 가니 디테일한 인테리어가 없어 훨씬 넓고 시원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 창문이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에어컨 이슈가 있으니 정당한 취소 사유가 되어 나머지 3박을 무료취소했다. 그 사이 두 명의 매니저가 차례로 와선 불편을 끼쳐 너무 미안하다며 나를 더 미안하게 했다.
그나저나 당장 내일부터 지낼 호텔을 또 찾아야 했다. 다행히 이 호텔 가까이에 메리어트 호텔이 있어 공홈을 통해 예약했다. 이런 5성급 호텔은 플랫폼 보다 공홈에서 멤버십에 가입한 후 예약하는 것이 비용이나 혜택면에서 더 낫다.
문제를 해결했으니 한숨 돌릴 겸 동네 구경을 나갔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오후 세시의 발리는 너무 뜨거웠다. 기온 확인을 하니 현재 온도는 31도인데 체감 온도는 39도라 알려주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콜라와 스파게티를 주문했는데 콜라는 미지근하고 스파게티는 너무 짜서 먹는 둥 마는 둥..
에잇!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닌가 보다.
자는데 뭔가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바닥이 물로 흥건했다.
'뭐야, 도대체 어디가 9.7점인 거지?'
호텔 매니저 Ani는 연신 미안해하며 호텔 비용으로 택시를 불러 메리어트 호텔까지 태워줬다. 내일 애프터눈 티를 대접할 테니 꼭 오라며 내 대답을 듣기 전까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친절한 그들에게 왠지 나도 미안하고 그들도 미안해하고.. 서로 더 미안하다며 웃음으로 마무리하는가 싶었는데 같이 기념사진을 찍잔다. 아, 솔직한 리뷰를 쓸 작정이었는데 어쩐담..
메리어트 호텔에 도착하니 아직 12시 전이다. 체크인은 오후 세 시인데 준비된 객실이 있다며 이른 체크인을 해준다.
이게 가능하다고?
아오, 이런 융통성 넘치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내 여행 계획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직원을 따라 554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방도 넓고, 테라스도 좋고, 에어컨 소음 없이 강하고, 무엇보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수영장이 끝내준다!
역시 호텔은 메이커가 최고구나..!
잘 모를 땐 브랜드를 골라야 한다.
Money tal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