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만 지금 행복해?
2015년 가을, 수능을 한 달 앞둔 어느날
"엄마, 대학생 되면 재밌어? 대학은 가고 싶지만 공부가 너무 힘들고 싫어. 오늘 친구들이랑 석식시간에 나가서 홍콩반점 짜장면 먹고 대청천 산책로 걷는데 기분이 너무 좋더라. 낙엽도 예쁘고 단풍잎들도 예쁘고.. 근데 학교 쪽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숨 막히더라. 공부가 너무 싫어."
어젯밤 야간자습 마친 수험생 딸이 차 안에서 혼자 독백하듯 쏟아낸 말이다. 그리고 이걸 물었다.
'엄만 지금 행복해?'
나는 지금 행복한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스르륵 풀리며 아주 잠깐동안 여럿의 이미지들이 보였다.
"엄마는 행복하지. 자상한 아빠에, 정의감 넘치고 씩씩한 딸에, 사랑스럽고 착한 아들이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외할머니, 해운대 할머니 두 분 다 건강하시니 감사하고 행복해. "
그러다 이것이 과연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힘센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건 식상한 모범답안일뿐이다. 다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이미지를 좀 더 구체화해서 말로 그려 보기로 했다.
"엄마는 아빠랑 주말마다 산책할 때 행복해. 손잡고 걷다가 싱거운 농담에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웃을 때 기분 참 좋아. 행복하지. 너 옷 사달라고 애교 부릴 때 있잖아. 그때도 엄만 얇은 권력을 느끼며 행복해.
만 원짜리 싸구려 옷을 사면서 즐거워하는 딸의 얼굴을 보면 몹시 사랑스럽거든. 행복하지.
훈이가 집에 오자마자 엄마~하고 부르며 손 잡고 흔들흔들할 때 행복하더라. 발냄새난다고 등짝을 때려도 안 떨어지는 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말이야.
음, 엄마를 아직 어린애로 보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엄마의 엄마 손에 온기가 있어서 또 행복해. 울 엄마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해운대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잡곡밥과 추어탕, 고등어구이를 먹을 때 진짜 행복해. 할머니가 보약 같은 밥상을 늘 차려 주시잖니. 할머니 같은 시어머니도 없을걸? 얼마나 감사하냐. 이것도 행복이지. "
백미러로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수미야, 우리 둘이 배낭여행 갔을 때 오르셰 미술관에서 고흐 그림 봤잖아. '별이 빛나는 밤' 기억나지? 정말 그림 속에서 별이 빛났잖아. 행복은 광활하고 캄캄한 밤하늘의 반짝이는 작은 별 같은 거야. 너 공부한다고 힘들고 지쳐도 친구들이랑 빵 사 먹으러 매점 갈 때 그 순간만큼은 기분 좋았지? 아까 학교밖에서 짜장면 먹으면서 기분이 몽글몽글 했지? 그런 순간순간들이 요즘 네 시간 속의 별이지. 엄마가 행복한 순간도 인생이라는 길고 지루한 시간 속에서 보면 아주 짧지만 별처럼 반짝이거든. 반짝이는 순간들이 모여 긴 고통을 잊게 하고 다시 갈 수 있는 힘을 준단 말이지. 너 낳을 때 36시간 진통하면서 다시는 아이 낳지 않을 거라 했는데 너 키우면서 또 그 고통은 다 까먹고 동생 낳았잖아. 아니, 고통을 까먹었다기보다 그런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가치를 알기에 출산을 또 한 거지. 행복은 그런 거야. 고통의 시간을 잠시 잊게 하는 반짝이는 순간들을 잘 모아놓는 것. 그리고 그 반짝임 들을 함부로, 허투루 여기지 않는 것.
엄만 소소하고 자잘한 별들이 많아. 엄만 제법 행복해. “
가족과 함께 하는 모든 일상이 다 좋을 수만은 없다.
때로는 전쟁 같은 부부싸움을 하고, 사춘기 아이들이 말대꾸를 하며 머리에 스팀돌게 하고, 연로하신 엄마와 시어머니가 아프실까 노심초사하는 일들이 일상 다반사다. 학교란 조직에서 교감, 교장한테 굽신거려야 하고 초딩들에게 개무시당할 때도 있고, 안하무인 한 학부형한테 수모를 겪을 때도 있다. 게다가 올해는 복병으로 두 번의 수술까지 받고 병휴직 중에 있으면서도 나는 행복하단다. 나도 몰랐는데 딸과 얘기를 하다 보니 복잡한 이즈음의 감정이 행복으로 정리가 되었다.
내 딸도 고난의 시간 속에서 잠깐잠깐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가을을 아주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는, 고3이길 바란다. 훗날 딸에게 같은 물음을 했을 때 나보다 더 자잘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로 별들을 그려준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겠지.
딸이 결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