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의 간섭_<국경시장> 서평

당신의 기억을 팔 수 있다면?

by 달의 노래


"언제의 기억을 파실 건가요?"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지워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기억을 팔 수 있다면? 없애고 싶은 옹이 같은 기억 따위를 돈을 받고 팔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제의 기억을 팔 것인가.

김성중 작가의 <국경시장>은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들어선 세 남녀가 국경시장에서 자신들의 기억과 물고기 비늘을 맞바꾸며 쾌락을 좇다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물고기 비늘, 국경, 보름달, 기억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본능이 통제될 수 없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인 '나'와 로나, 주코는 겉으로 보기에는 느긋한 여행자들이지만 이들에게 여행은 정착과 안정의 반대편에 있는 세상일 뿐이다. 불안정한 내면을 가진 여행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셋은 충동적으로 함께 P국으로 떠난다. 이로써 셋의 조합은 이미 위태로워진 것이다.


현란한 조명, 심장이 터질 듯한 음악 소리와 함성이 가득한 곳, 강렬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카지노, 테마파크, 게임방 등과 같은 공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현금이 아닌 토큰화된 수단으로 소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란 것이다. 카지노 안에서는 현금을 칩(토큰)으로 바꿔서 거래한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돈처럼 느끼지 않게 하여 현실감각이 흐려진 사람들이 더 쉽게 더 많이 베팅하게 만든다. 실물 화폐를 쓰지 않는 게임이나 테마파크에서도 지불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내가 얼마를 썼는지,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한 각성이 흐릿해진다.


"이 물고기들은 세상의 어떤 화폐로도 환전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그 사람의 기억과 맞바꿀 수 있을 뿐이죠."(p.20)


세 명의 여행자가 들어가게 된 국경시장에서는 기존의 돈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열다섯 살 미만의 소년들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에서 떨어진 비늘만 진짜 화폐로 통용된다. 노란 비늘은 마치 현실과 단절된 세계에서 통용되는 마법의 토큰과도 같다.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맛있는 음식들과 진귀한 물건들, 성적 환상이 펼쳐지는 국경시장에서 원하는 것을 사려면 물고기 비늘이란 화폐가 필요하고, 그것은 오직 사람들의 기억을 팔아야만 얻을 수 있다. 마치 도박에 중독된 이가 자신의 영혼마저 저당 잡히듯, 자신의 기억을 조각내어 비늘과 맞바꾸다 끝내 모든 기억을 탕진하게 된다. 이것은 노란 비늘을 얼마나 썼는지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토큰의 속임수다.


<국경시장>의 공간적 배경인 '국경'은 나라 간의 지리적 경계선이다. 분명하고 명확한 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 세계의 언어와 냄새, 문화가 뒤섞이는 모호한 경계가 아닐 수 없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열리는 국경시장에 가려면N국과 P국의 경계인 느네카 강을 건너야 한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현실과 환상이 나뉘는데 국경의 역할을 하는 강은 흐르는 물처럼 경계와 구분이 모호하다. 이처럼 모호한 국경의 시장은 세상에 본 적 없는 신기한 물건들과 영혼을 앗아가는 환상과 쾌락으로 가득하다. 시장의 본성이 소비인만큼 국경시장의 본성 또한 다르지 않다. 쾌락적 본능을 사기 위해 물고기 비늘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을 얻으려 기억을 팔고 팔다 결국 내가 무엇을 팔았는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모든 자아를 잃게 되는 곳이 바로 국경시장의 본성이다. 국경시장은 술, 도박, 마약 같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온갖 종류의 것으로 불안정한 인간을 현혹하는 화려한 지옥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장치 중 하나는 보름달(Full Moon)이다. 보름달이 뜰 때 야수로 변하는 늑대인간의 신화처럼 서양에서의 ‘달’은 예로부터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광기, 마법, 충동을 상징하는 미신적 대상이었다.

‘미친 사람’을 뜻하는 ‘lunatic’이라는 단어가 라틴어 luna(달)에서 유래된 것으로 달의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보름달은 바로 광기의 마법이 시작됨을 알리는 타이머인 동시에 달빛이 비추는 공간 속 인간들을 옭아매는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다. 마성의 보름달이 뜨고 지는 것에 맞추어 국경시장도 주기적으로 열리며 달빛이 품은 사람들을 달뜨게 한다. 느네카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아이들, 국경시장에서 만난 뻔뻔한 걸인, 금실로 수놓은 자수 허리띠만 두른 벌거벗은 여인들 모두 만월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실루엣이다.


<국경시장>에서 던지는 화두는 기억이 무언가를 살 수 있는 교환 수단이 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기억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에게 기억이란 인간성을 쌓아 올리는 계단과도 같다. 밑층이 있어야 그 위로 위층을 쌓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태어난 이후부터 기억이라는 계단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며 나만의 고유한 자아를 구축한다. 고통스럽거나 불편한 기억이라고 해서 어느 위치의 기억 계단을 빼낸다면(마치 '젠가'처럼) 자아는 균형을 잃고 흔들리며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다. 손목에 세 눈금이 생기던 때의 기억을 팔아버린 루나, 생각조차 나지 않는 두세 살 적 기억부터 팔기 시작한 주코, 아버지가 돌아와 함께 살기 시작한 때의 기억을 판 '나', 이들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기억을 팔았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졌거나 행복을 찾은 것은 아니다. 불행했던 기억을 팔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좋았던 기억의 비교값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기억의 총체에서 빼고 싶은 기억 조각들은 세월에 희석되고 바래져 스스로 기억해내지 못할 때까지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남아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지독한 열등감으로 고통받았을 때의 기억이 훗날 성공의 원동력이 될 수 있고, 아픈 상처였던 기억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는 공감자가 되게 하여 주위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인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 고통의 기억을 견뎌낸 사람은 단단한 자아로 세상과 맞선다.

팔 수 있다면 ‘그때’의 기억을 팔고 싶다는 유혹과 함께 <국경시장>의 메시지는 보름달의 인력처럼 독자를 끌어 당긴다. ‘나’는 내 기억의 총체이니 자연적 망각이 아닌 의도된 삭제는 자아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드러낼 수 없는 ‘그때’의 기억을 팔고 싶은 유혹에 이끌린다면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그때의 자신을 마주하고 꼭 안아 주어야 한다. 다만 보름달의 간섭을 경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