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윤주 Oct 22. 2022

부러워서 아팠더라!
- 애증의 분홍소세지

아침에 만난 음식 추억

분홍 소세지 아침밥


2021. 11. 8. 월요일


늦가을 비가 오는 월요일 아침. 하루 종일 비가 온다니 술 마시기 참으로 좋은 날이겠구나! 

그러나 오늘은 술을 마실 수 없어. 애플 TV가 상륙했으니 구경해야 하잖아? (디즈니플러스를 애타게 기다리며)


닥치고 분홍 소세지, 낙지 젓갈 무침과 구운 파래김의 환상 조합, 그리고 마른 오징어 조림 또는 볶음, 그 사이? 그리고 동생이 나눔 해준 콩나물로 콩나물국! 이것이 나의 풍성하고 행복한 아침 밥상! 


분홍 소세지가 있어 아주 행복한 밥상이지만 이 놈의 분홍 소세지는 내게 애증의 반찬이다. 난 요즘 에니어그램.을 수련하는데 올 봄, 기초반 때 내 생의 첫 번째 상처를 찾는 과정에서 분홍 소세지가 떠올랐다. - 먹는 것에 얼마나 진심이면 인생의 첫 상처가 “먹는 것”인가 싶으면서 쪽팔리면서 어이가 없기도 했고, ‘정말 [먹는 것에 진심]인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나를 이해하는데 쉬워졌다. 그리고 안심이 됐다. 


나의 첫 상처, 분홍소세지 장면은 이렇다. 

내 나이 6살.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빠가 군인이어서 군인 아파트에 살았는데 우리 집은 1층, 2층에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동갑내기 친구 주미가 살았다. 주미와 나는 유치원에 같이 가기 위해 내가 준비가 빨리 끝나면 주미네 집으로 올라갔고 주미가 준비가 빨리 끝나면 주미가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내 기억에 대부분 내가 주미네 집으로 올라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준비가 빨리 끝난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우리 엄마는 유치원 때부터 나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거의 14년간, 등교시간 보다 약 1시간에서 두 시간가량 빨리 재촉해서 내보냈다. 늦는 것 보다는 학교에 가서 자더라도 일찌감치 가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덕분에 교문을 열고 들어간 적도 꽤 있고 내 동생은 소풍날 관악산이나 서울랜드에서 두 시간 동안 친구들을 기다린 적도 있다.

여자 아이들의 헤어 스타일은 어릴 때 대부분 긴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묶고 다니는데 나는 단발 머리였다. 엄마는 내 단발 머리를 잘 빗어 주시거나 핀을 꽂아 주셨다. 머리 묶는데 걸리는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주미네 집으로 올라가야 주미가 긴 파마머리를 이리 묶고 저리 묶음을 당할 때 (6살 아이가 직접 묶지는 않으니 주미 엄마가 묶어 주니까) 먹는 분홍 소세지를 조금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사실 이걸 먹기 위해 나는 엄마의 재촉에 군소리하지 않고 유치원에 갈 채비를 빨리 마쳤을 수 있다. 


주미는 얼굴이 하얗고 까만 눈동자, 얇은 쌍꺼풀에 얇고 짙은 속눈썹이 동그랗게 위로 올라간 눈을 가진, 거기다가 풍성하고 긴 파마머리를 한, 인형같이 예쁜 아이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만큼 정말 예뻤다. (유치원 졸업사진도 기억에 한 몫을 했으리라) 그렇게 예쁜 주미는 아침에 나처럼 된장국에 밥을 먹는 건지 안먹는건지 모르겠으나 내가 올라갈 때 마다 밥 그릇에 깍둑 썬 분홍 소세지를 케찹에 비벼 포크로 찍어 먹고 있었다. 처음에 그걸 빤히 쳐다 보고 있었더니 주미 엄마가 내 것도 조금 갖다 주셨었다. 근데 이게 진짜 맛있네?! 


우리 엄마는 왜 소세지 반찬을 안해줄까?  


이런 생각은 그 때 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한테 주미가 먹는 소세지가 먹고 싶다고는 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엄마는 ‘소세지’ 같은 반찬은 안키웠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지금이야 소세지가 종류도 많고 싸지만 그 땐 비쌌다. 향만 나는 그 밀가루 덩어리 분홍 소세지도 비쌌다. 우리 집은 소세지 반찬을 매일 먹을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주미네 집에 매일 같이 올라간다고 주미 엄마가 매일 내게 비싼 소세지를 한 그릇 씩 줄 리는 없었다. 안주는 날이 더 많았고 그러면 주미가 자기가 먹던 것 중 한 두 개를 내게 먹여줬다. 원래 감질나게 먹으면 더 맛있다. 나는 맛있지만 주미 엄마가 보기에 나는, 딸 밥그릇 탐내는 굶주린 늑대로 보였을 것이다. 


분홍 소세지를 얻어 먹던 여섯 살의 나, 

그 장면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내게 됐다.

난 어릴 때 그 흔한 마론인형을 가져본 적이 없다. 미미건 라라건. 그 엇비슷한 뭐를 소유하게 됐을 때는 이미 나나 내 친구들이 인형 놀이를 하지 않을 때였다. 좋아하는 척은 했지만 좋지 않았다. 일단 미미도 아니었고 예쁘지도 않았다. 사실 난 주미처럼 머리도 기르고 파마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얘기한 적이 없다. 다른 친구네 집에 가면 다 있는 블록 놀이 세트도 없었다. 레고는 당연히 아니어도 영 플레이모빌을 갖고 있던 친구네 집에 가서 집도 짓고 소방서도 짓고 병원도 짓고 왔다. 친구들 집에는 디즈니 동화책 시리즈가 있었다. 그것이 30권짜린지 50권짜린지 100권짜린지의 차이가 있었지 어쨌거나 다 있었는데 우리 집엔 없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런 걸 사달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얘기해도 사 줄 수 없다는걸 그 때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오래토록 엄마가 미웠다.

하고 싶은 게 많고 호기심도 많은 애로 낳아줬으면서 들어주지도 못하는 형편의 엄마가. 아빠와는 사정이 좀 달랐는데 아빠와는 뭔가 얘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결론은 같았지만. 어쨌든 엄마와의 골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회복이랄게 없는 게 애초에 엄마와 나는 뭐가 그리 애틋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다못해 소세지 반찬 해달라는 말조차도 못했는데 말이다. 올봄, 나의 첫 번째 상처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엄마의 뱃속에서 빨리 뛰쳐 나온 동생은 나와 딱 13개월 차이가 난다. 몸이 약해 태어난 동생 덕에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순간부터 엄마 등에 업히는 것은 포기해야했다. 엄마 등은 하나니까. 포항 죽도 시장, 엄마와 나와 동생이 그 넓은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가 그랬대. “엄마 다리 아파.” 그게 네 살, 다섯 살.. 

처음에는 그 때의 내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은 짐대로 들고 연년생 남매를 하나는 들쳐 업고 하나는 거의 잡아 끌고 시장을 보러 다니는게... 동생을 낳고는 병원에 있는 동생을 보러 다니느라 본인의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셔서 그리 오래 고생하셨는데 어린 애가 그걸 알 리 없고 말이다. 


지금 엄마와 나는, 겁나 친하다. 

엄마는 아빠 욕을 하고 싶을 때 내 집에 와서 몇 시간을 있다가 가고 내가 일하고 있으면 심지어 주무시다가 가신다. 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마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불편했을 것이고 한 시간 이상 같이 앉아있는 건, 아오~ 고문이지! 


이제 분홍 소세지는 아무 때나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다. 

분홍 소세지보다 맛있는 것도 많다. 흔해 빠졌고 몸에도 좋지 않고 맛도 뭐 그냥 그렇고 딱히 귀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늘 원츄 원츄 반찬이다. 아직도 엄마는 분홍 소세지를 사는 법이 없다. 나의 냉장고에 상비약처럼 항상 자리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 그런데... 주미는...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분홍 소세지, 아직도 먹으려나?







작가의 이전글 초특급 부자들의 반찬, 홍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