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ampirin Jun 16. 2019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어떻게 죽을 것인가?

                                                                                                                                                                                                                                                                                                                                                      똘스또이의 작품들은 대부분 분량이 많아서 읽기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그의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분량이 다소 적어도 깊은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어서 좋다. 성인 대상 독서토론에서는 늘 별점이 높은 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읽어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정도로 인물의 성격과 상황 묘사가 뛰어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 2012)



1. 이반 일리치의 성격과 가치관


작품의 전반부엔 이반 일리치가 어린 시절부터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잘 설명돼 있다.


법률학교 다닐 때부터 그는 이미 평생 변치 않을 그런 성품을 보여주었다. 능력있고, 밝고 선량하며 사교적이면서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해내는 그런 성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나 커서나 아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처럼 어려서부터 사교계의 최고위층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려 그들의 습관이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따라 배우며 그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갔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는 마음을 빼앗기고 열중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특별히 결정적인 영향을 남기지는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한때는 연애 감정이나 허영심 같은 것에도 빠져 보았고 졸업할 무렵의 고학년 시절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에 젖어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마음속에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인정되는 일정한 한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법률학교 재학 중 그는 참으로 역겨운 행동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그런 행동을 한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체 높으신 분들도 그런 행동을 종종 저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생각을 바꿨다. 비록 좋은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싹 잊어버리고 그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기로 한 것이다. (p.24-25)

흔히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유형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능력있고, 밝고 선량하며 사교적이면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해내는 그럼 성품"을 가진  아이들이 우리의 학창 시절에도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엄친아 혹은 엄친딸"이라고 불리는 아이들과도 비슷하다. 어쨌든 이런 아이들은 의무적인 일들을 철저히 해냈기 때문에 당연히 학교 성적도 좋았고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똘스또이의 표현이 재미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부모님, 선생님 혹은 "높은 사람들"이 의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이반 일리치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철저히 해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역겨운 행동"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그때도 "지체 높으신 분들"이 종종 저지르는 일이라는 생각에 "혐오감"도 억누르고 잊어버렸다고 한다.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하길 포기했다는 말이다. 그의 삶의 기준이 "높으신 분들"과 "지체 높으신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2. 이반 일리치의 결혼과 결혼 생활


그는 결혼 역시 이러한 가치 기준에 따라 했다. 


그녀는 그에게 빠졌다. 이반 일리치는 결혼하고자 하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빠진 아가씨를 보면서 이렇게 자문했다. ‘그래, 사실 결혼을 못할 이유도 없잖아?’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는 훌륭한 귀족 가문의 아가씨로 미모가 빼어나고 많진 않지만 재산도 좀 있었다. [……] 집안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녀가 사랑스럽고 예쁘고 아주 괜찮은 여자였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신부가 될 여자를 사랑했고 인생관에서 서로 공감하는 바가 있어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른 말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부추겨서 결혼했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결혼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서였다. 우선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하게 되어 자만심이 채워졌고,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30-31)


출신 계급이 좋고, 미모가 빼어나고 재산도 좀 있어서 자신의 "자만심"을 채워줄 뿐 아니라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상대였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는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결혼했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그녀의 인생관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도 아니며 주변의 부추김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는지 잘 알고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결혼 초기에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했으나 아내가 임신을 한 다음부터는 남편의 역할을 하는 것을 심히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해한다.


이반 일리치는 항상 품위있게 사교계에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삶의 아주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혼 초기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그런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깨뜨리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더욱 깊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하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불쾌하고 힘들고 별로 품위도 없는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어떻게 벗어날 도리도 없는 그런 사태였다.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아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삶의 유쾌함과 품격을 '제멋대로' (그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질투하는가 하면, 자기에게만 신경을 써달라고 매달리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거칠고 불유쾌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 이반 일리치는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그는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적어도 자기 아내와는) 유쾌하고 품격있는 생활과 항상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런 생활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파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 그리하여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독립된 세계를 지키고자 공무와 관련된 온갖 의무를 핑계로 아내에 대항해 나갔다. (p.32-33)

그 이유는, 그에게 "항상 품위있게 사교계에서 인정받으며 사는 것", 다시 말해 "삶의 유쾌함과 품격"이 삶의 아주 중요한 일부였는데 임신한 아내의 신경질적인 모습이 그런 것을 파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아내가 임신으로 인해 겪는 수많은 고통과 불편함에 대해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독립된 세계를 지키고자 공무와 관련된 온갖 의무를 핑계로 아내에 대항해 나갔다"고 한다. 

이 부분의 묘사는, 단지 제정 러시아의 한 예심판사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자만심과 허영을 만족시켜주는 결혼을 하면서 한 아내와 결혼 생활로부터 안락함과 유쾌함, 그리고 품격 유지를 기대했던 남자들이 그것이 훼손됐다고 느낄 때 보이는 방어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반 일리치처럼 공무로 도피할 수도 있고, 바람을 피울 수도 있고, 매일 술자리를 찾아 떠돌아 다닐 수도 있고, 요즘에는 게임에 빠질 수도 있다. 똘스또이의 개인적 경험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3. 우연한 사고와 그로 인한 몰락


결혼 생활의 불쾌함에도 불구하고(혹은 그 덕분에?) 그는 예심판사직을 잘 수행했고 정국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함에 따라 승진하여 법무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도시로 이주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먼저 도시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을 찾아 정성껏 손수 집안을 꾸민다. 이렇게 원하던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고 느끼며 만족감이 최고도에 달하던 바로 그때 그는 사소한 부주의로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친다. 아팠지만 별것 아닌 줄 알았던 그 상처는 그를 심한 고통에 빠뜨린다. 의사도 병명을 정확히 모르고 약도 그의 병세를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나을 가망이 없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며 환자의 입장이 되고 보니 예전에는 당연하고 문제 없어 보이던 삶의 방식이 엄청난 거짓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거짓이었다. 그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을 뿐이고 안정을 취하고 치료만 잘한다면 곧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모두들 빤한 거짓말을 해댔다. 아무리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갈수록 심해지는 고통과 죽음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거짓말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고 이반 일리치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끔찍한 그의 상태를 감추려고만 했다. 게다가 이반 일리치마저 그런 거짓말에 동참하게 하려고 했다. 
   거짓말, 죽기 직전까지도 멈추지 않을 이런 거짓말, 이 무섭고 장엄한 죽음의 의식을 인사차 들었다든지, 커튼이 어떻다든지, 오찬 자리의 철갑상어 요리가 어떻다는 따위의 일상의 사소한 것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하는  이런 거짓말, 바로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는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고 싫었다. [……]   그가 보기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을 그저 있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일, 특히 조금 품위가 없는 (온몸에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응접실에 들어온 것 같은) 일 정도로 격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써온 '품위'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그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p.82-83)

그의 주변 사람 어느 누구도 그의 고통과 좌절에 공감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빤한 거짓말로 위로하며 죽음을 앞둔 그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데, 그들의 삶의 방식이 "바로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써온 '품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품위를 유지하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던 이반 일리치는 그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존재를 거부하며 피해왔다. 그의 결혼생활이 바로 그런 삶의 방식의 전형적인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삶의 방식을 추구한 건 이반 일리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아내, 그의 딸, 그의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 등 여전히 '품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커튼이나 철갑상어 요리와 같은 무게로 그의 고통과 좌절을 대한다.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핵인싸'였던 이반 일리치가 '아싸'가 되고 난 후에 모든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고, '인싸'들의 삶의 방식이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에는 전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높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고 싶었던 마음속의 어렴풋한 유혹들, 생각이 나자마자 신속하게 털어버렸던 그런 은밀한 유혹들, 어쩌면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일과 삶의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모든 이해관계도 다 거짓인지 모른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변호하려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허약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무엇 하나 변호할 수가 없었다.
[……]  그는 똑바로 누워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시종과 아내, 그리고 딸과 의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날 밤 깨달은 끔찍한 진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삶도 죽음도 가려버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만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런 의식은 육체적 고통을 몇 배, 몇십 배 가중시켰다. 그는 끙끙 앓으며 몸부림치면서 입고 있는 옷을 쥐어뜯어 풀어헤쳤다. 옷이 숨통을 조이고 짓누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날 아침 그는 그들 모두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p.111-112)


그는 최후의 3일 동안 극단의 고통에 시달리며 내내 울부짖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그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이 결국 거짓으로 가득찼으며 어느 누구의 공감과 위로도 받지 못하며 이렇게 죽어간다는 사실은 육체적 고통에 못지않은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몸부림치던 그가 내지른 마지막 절규. 상상만 해도 끔찍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렇게 비참하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하는 단 한 사람으로 울음으로 그의 정신적 고통이 정화됐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는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 부딪쳤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p.117)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바꿀 힘도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p.118)
“아,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고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p.119)


마지막 순간에 이반 일리치가 한 말, 즉 무척 기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고통에 시달리며 그가 많은 것을 깨닫고 내려 놓을 수 있었기에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제 죽게 되었으니 더 이상 끔찍한 고통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기쁘다는 것일까? 


그가 거짓으로 가득한 것을 추구하며 위선적인 삶을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차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린 아들의 순수한 눈물 때문이었다. 아들의 공감과 슬픔이 그의 정신적 고통을 순화시켜 주었고,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이 이렇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본다. 그가 두려워했던 죽음은, 그가 정말 죽음으로써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고 아쉬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홀가분함. 그것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죽는 순간 어떨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고 의식하는 자의 삶은, 죽음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자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내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너무나 우울하고 무기력해서 죽음을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생각이다. 내가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며,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를 내가 모른다는 것. 사실 바로 오늘도 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며 지금 이순간을 살면 어느 순간 죽음이 닥쳐 왔을 때 두려움이나 회한에 휩싸이는 대신, 기꺼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것이 아닌, '높은 분들'과 '고위층'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며 살던 이반 일리치. 그렇게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그였지만 그의 삶은 거짓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소중하고 귀한 것을 찾아 살지 않고 '품위있는 삶'이라는 외적으로 부여된 가치를 따라 살았다. 그가 삶의 실체를 직면하며 겪는 고통은, 스스로 생각하며 반성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진 벌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반 일리치가 가졌던 것과 유사한 삶의 목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불나방 같은 사람들. 그래도 이반 일리치는 병에 걸린 덕분에 인생의 진실을 직면하고 수용한 후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거나 외면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작은 손잡이에 찔린 상처 하나로도 무너질 수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을까?     


구글링하다가 국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겉표지와 외국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의 겉표지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을 텐데, 편집자들이 겉표지에 사용한 그림들을 비교해 보니 흥미롭다.





#이반_일리치의_죽음#톨스토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