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잘 사는 것이 나에게는 기도가 돼.
내가 참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절대 녹록하지 않은 삶의 길을 걸어온 그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특유의 유머와 자신을 직시할 줄 아는 단단함으로 삶에 응답한 그녀를 참 존경한다.
친구와 헤어질 때면 나는 종종 '기도할게'라고 인사했다. 어떤 기도를 하면 좋을지 덧붙여 물으면서. 그녀는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네가 잘 살아. 그러면 그게 나에게는 기도가 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가 잘 지내는지'가 너에게 '무엇을 주는' 기도가 되는지.
시간이 흐르며 그 물음은 내 안에서 무르익어 이젠 나의 말이 되었다.
친구는 내 삶이 기쁘고 슬플 때마다, 함께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을 터였다. 그래서 내가 어떠한 삶의 모양 안에서도 한결 같이 있어 준다면, 그저 존재해 준다면 그것이 자기 삶의 위안과 희망이 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받은 상처가 나와 상관없지 않아.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잘 걸어가 주면 나 역시 그걸 보고 힘을 낼게.
내게 특별히 무엇을 주어서가 아니라, 네가 잘 살면 내가 안심이 돼."
그래서 나는 작은 장애물을 만날 때 때때로 그녀를 생각하며 넘어 본다.
늦은 저녁 두 아이 재울 준비를 시키다가 피곤하고 예민해져 날이 설 때, 두 번 낼 신경질을 한 번만 내보자고 한다든지. 예민하게 응대하는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나 역시 날을 세우려다가도 심호흡 한 번 하고 한 톤 낮게, 반 박자 천천히 말한다든지. 내가 겪는 작은 괴로움에 지지 않고 잘 산다면, 그게 너를 위한 기도가 될 거라고 믿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다. 그렇지만 내가 괴로운 게 엄청난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사소한 고통에서도 오는 거라면, 아주 작은 나의 기도도 너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극인 박지선 씨가 유명을 달리했다. 누군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늘 익숙하지 않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것도 그렇다. 괴로우면서 미안하고, 멀리 있지만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의 몫을 생각하게 된다. 고인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죽음을 전해 들은 모든 이들. 다른 이의 죽음이 내가 가진 희망의 불씨를 꺼뜨렸다면, 내가 외면했던 괴로움을 들춰냈다면 부디 홀로 견디지 말아 주기를. 아주 사소한 마음의 일렁임이라도 들여봐 주기를. 도움을 요청하기를. 그리고 우리 서로 위로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