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와의 감정대화 시간.
사진 by Levi XU on Unsplash.
하원 후 엄마와 아들의 대화.
축복아, 유치원에서 오늘 뭐 배웠어?
몰라요.
축복아, 점심에는 뭐가 나왔어?
몰라요! 거기 급식표에 나오잖아요.
축복아, 오늘은 자유놀이 시간에 누구랑 놀았어?
(연이은 질문공세에 휙 장난감 박스 앞으로 가버린다.)
딸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있던 일을 조잘조잘 말도 잘한다는데, 아들은 '몰라요, 아니요, 묵언수행' 3종 세트를 입에 장착했는지 집 밖의 일을 알려면 친구 엄마, 담임 선생님, 우연찮게 친구들을 만났을 때 하는 대화를 형사처럼 조합해서 유추하고는 합니다. 아무리 아들의 언어가 딸보다 평균 1.5년 느리다지만 그렇다 해도 아들 마음과 소통하는 것은 엄마로서 참 어렵습니다. 한 때는 '남자는 감정에 좀 서투르지'라며 남자애의 스트레스 해소는 운동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운동만으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들의 과격하거나 뭉툭한, 혹은 단조로운 표현 안에도 감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여자만큼이나 섬세한 감정이요.
여자아이들이라고 상황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뇌구조상 여자가 남자보다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이 더 발달하고 좌뇌와 우뇌의 연결도 더 많아 감정과 이성의 균형이 더 잘 이루어진다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여자의 감정 표현을 좀 더 허용하는 분위기니 여자 아이들이 감정을 배울 기회는 더 많기도 하구요. 그러나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지 여자아이들도 감정 인식과 표현, 조절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정신장애의 85%가 감정조절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감정을 잘 인식하고, 수용하며, 표현하는 법을 잘 알면 우울과 불안, 수많은 스트레스성 신경증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에서 상담했을 때, 아이들이 뛰어난 지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고장 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감정 조절하는 법만 제대로 키웠다면 훨씬 더 높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했을 테지요.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최선으로 발휘하도록 하는 데에 감정조절능력은 꼭 필요합니다.
아이의 감정조절능력을 키우도록 부모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선생님, 친구, 형제자매, 책, 유튜브 등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레퍼런스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부모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바로 '곁'입니다.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근접성은 비록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할지라도 그 자체로 큰 기회입니다. 가까이 사는 사이는 어떻게든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니까요. 곁을 내준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 아이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되돌려주는 반응, 아이와 부모가 만드는 특정한 관계의 결. 이것이 아이의 감정체계에 영향을 줍니다. '곁'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간을 두고, 경로가 좀 이탈해도 회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니면 다시, 또다시, 다시- 하면서 조율해 갈 수 있습니다.
부모가 곁을 활용하는 방법은 꾸준하게 계속하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학습지를 과목별로 하루에 한 장씩 풀도록 시켰습니다.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말입니다. 아이가 힘들어하면 양을 대폭 줄였습니다. (그래서 한 장...) 그러나 꼭 매일 조금이라도 하도록 시켰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습관'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조절능력의 씨앗을 아이에게 심어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아이와의 대화 속에서 아이의 감정을 듣고(경청), 되돌려줍니다(반영). 특별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 이 시간을 따로 떼어두면 훨씬 더 좋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감정을 꺼낼 수 있도록 어떤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밤을 활용합니다. 잠자기 전 책을 읽어주거나, 들려주거나, 속상한 얘기를 꺼내거나,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거나 부모 마음속에서 아이와의 대화 공식은 같습니다. ①잘 듣기(경청), ②감정 비춰주기(반영)입니다.
아이에게 이 대화 시간에 대한 기대감과 주도성을 주면 좋습니다. 저희 아이는 '미니'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게 귀엽다면서요. 처음에는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어 했는데, 매일 밤 자기 전 '미니'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좀 개운해졌는지 언젠가부터는 '엄마, 미니 하자요.' 하면서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다만 사춘기 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제부터 부모와의 대화 시간을 갖자'라고 말하면 냉랭한 반응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름 짓자고 하면 오글거린다면서 도망갈 수도 있구요. 이럴 때는 그냥 본론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만큼의 여유를 두고', '자기 감정에 집중해주며', '곁'을 내어주는 부모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아이와 같은 템포로
감정을 잘 듣는 것은 토익 점수 700 정도 되는 사람이 CNN 뉴스를 받아쓰기 빈칸 채워 넣기 할 때만큼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아이보다 속도가 빠르거나 느리면 감정대화가 끊어집니다. 같은 속도로 가야 합니다.
아이: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가 내가 만든 장난감 다 부셨다?
엄마: 헉! (이마에 내천川자 그린 표정). 속상했겠네?
아이: 음... 아니? 그냥 다른 거 만들었는데? 근데 엄마, @$%^#!
아이는 아마 친구가 장난감을 부서뜨린 게 거슬렸을 것입니다. 엄마는 공감해주고 싶어서 아이의 감정을 지레짐작하고 비언어적으로 무척 속상했겠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이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기에 금방 수습하고는 다른 얘기로 넘어갑니다. 아이의 감정에는 범주도 있고, 강도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면 '그랬구나. 그래서 기분이 어땠어?' 하고 기다리면 좋습니다.
열린 질문
아이 말 한마디마다 크게 동요하지 않으면서 열린 질문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감정대화를 할 때 예, 아니요 같은 정답이 있는 질문을 피하라고 많이 얘기합니다.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답이 정해진 얘기는 입을 닫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싸웠다던 걔 있잖아. 걔랑 어떻게 됐어? 화해했어?'라는 질문도 속도를 천천히, 톤을 낮게 유지하면서 말하면 취조하는 질문이 되지 않고 마음을 여는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태도입니다. 부모의 호기심을 채우기보다 아이의 감정을 편안하게 만들도록, 부모가 아이에게 한 질문을 언젠가는 아이가 스스로 되뇌며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돕겠다는 태도 말입니다.
감정대화의 목표는 아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을 드러내면 그것을 충분히 겪도록 함께 머물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초점은 감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왜'를 끊임없이 묻는 사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문에 아이와의 감정 대화에서도 자꾸 원인을 캘 수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캐치하면 전후관계를 따져 물어서 해결하고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회복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왜라고 묻는 것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본질에 접근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정대화는 다른 방식을 사용합니다. 감정이 해소되는 과정은 원인-결과의 논리적 추론보다는 느끼고 향유하는 방식이죠. 아이가 '나 힘들어.'라고 말하지만 망설이며 침묵할 때, '왜 힘들어?'라고 묻지 않고, '힘들구나.'라고 감정에 같이 머무르는 반응(침묵할 수도 있고, 차분하게 눈을 응시할 수도 있고)을 하면 자연스레 왜 힘든지 그다음 이야기를 꺼냅니다.
엄마 죽는 줄 알았어요. 안 올까 봐 슬펐어요. 얼마나 슬펐는데요.
여느 날처럼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첫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둘째 임신 때 아이가 위험해서 다섯 달 정도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를 기억하며 말한 것입니다. 입원 기간 동안 아이는 한 번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거나 울거나 침울해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선생님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영상통화를 하면 방긋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죠. 유치원에서도 잘 적응했습니다. 다만 밤마다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몸으로 운 것입니다.
출산을 하고 첫째에게 그때에 관해 물으면 한결같이 '나 엄마 많이 안 보고 싶었는데요? 진짜 괜찮았는데요?' 하며 경쾌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툭, 자기 마음속에 묻어뒀던 감정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아이는 한참을 소매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아이가 되어 슬프고 서럽다가, 엄마가 되어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또, 아이의 감정을 지켜보는 마음속 상담사 목소리가 되었을 때에는 기특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는 이제 슬프면 억압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해서 시원해지는 경험을 얻은 것입니다. '미니'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의 일입니다.
국영수처럼 감정도 교과목에 넣어 가르치면 참 좋겠다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 아이가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부모의 곁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아이와 감정대화 시간이 쌓이면 부모 자신의 감정도 건강하게 돌아보는 훈련이 되는 것은 덤으로 받는 선물입니다.